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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이또이 Dec 13. 2021

롤랑 바르트, 훔치고 싶은 생각들...

오랜만에 아침다운 아침을 맞는 기분이다. 무언가에 몰두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몰두를 만들어내는 무언가를 어떤 의심도 없이 찬양할 수 있다는 것에 바르트가 말하는 지적활동의 관능적 쾌락을 나또한 옹호하게 된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쓰는 행위 자체로 나의 자유로운 권리를 행하고 있다는 생각을 전적으로 타당하게 한다. 언어는 유창할 수 있지만 의미 없는 유창함은 실로 의미없다 생각하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전달할 뿐 설득하지 않는 쿨함도 가져야 한다는 데 오늘 또 하나를 배우게 된다.


그저 생각이 좋아서 표현되는 문장이 좋아서 바르트의 생각들을 훔치고 싶어서 그의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비평한 수전 손택의 글을 옮겨봤다. 수전 손택의 글을 읽고 비평가로서의 삶을 자처한 정여울 작가의 선택이 궁금했고 그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지 간절히 알고 싶었다. 그렇게 선택한 수전 손택의 『강조해야 할 것』 책은 비판으로서의 비평이 아닌 순수 그 대상의 가치를 알고 싶어 하게 만드는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비평의 대상을 알지 못하면 집중 할 수 없는 책인 건 분명하다. 역으로 책을 읽으며 그 대상을 알아보고 싶다 생각하게 만드는 것도 이 책의 분명한 역할인 듯하다. 작가의 생각이 분명할 때 생기는 이상한 끌림이라고 해야 하나. 멋진 문장과 표현 그리고 잠정적이지 않은 확신에 빠지게 된다.





'형식주의적 기질'은 자의식으로 충만한 시대에, 사유하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감수성의 한 형태이다. 이 감수성을 더욱 일반적으로 보여주는 특징은, 취향이라는 기준에 의존하는 현상이며 주체성이라는 도장이 찍히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당당히 거부하는 현상이다. 이들은 확신을 가지고 무언가를 단언하지만, 또한 자신의 단언이 잠정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강조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저속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 될 것이다. 실제 이런 감수성을 잘 보여주는 사람들은 자신이 아마추어라는 사실을 으레 강조하곤 한다. 바르트도 1975년의 어느 인터뷰에서 "언어학에 관해서는 저는 아마추어에 불과합니다"라고 말했다. 후기 저작에서도 바르트는 체계 창조자라는 통속적 역할을 거부하며 자신이 권위자나 스승, 전문가가 아니라고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이것은 즐거움이라는 특권과 자유를 스스로에게 남겨두기 위해서였다. 바르트에게 취향의 훈련은 주로 찬미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말로 표현한 적은 없지만, 늘 찬미할 만한 새롭고 낯선 것을 탐색했으며(이것을 위해서는 기존의 취향과는 어울리지 않아야 한다), 혹은 익숙한 작품을 다른 방식으로 찬미하려 했다. 수전 손택, <강조해야 할 것> 중 "글쓰기 자체 : 롤랑 바르트에 관하여"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아마추어야말로 글쓰기의 특권과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생각하게 됐다. 그저 그렇고 그런 일상과 그 일상에 숨어 사는 내가 무엇을 찬미할 수 있는 주체라는 데 의미를 두게 된다. 그것은 자존적 자아를 발견하는 일이고 나아가 나와 관계된 것들에 큰 숨을 불어 넣음으로써 나를 살아가게 하는 힘의 원천이 되기에 이른다. 글쓰기 행위를 통해 나를 부정하는 것은 나를 발견하기 위한 몸부림이며 그 몸부림은 결국 자신을 만드는 큰 초석이 될 거라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먹고 사는 일 모든 것이 글쓰기를 통해 찬미할 수 있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모든 형식의 작품들이 '텍스트'라는 위대한 민주주의 공화국의 시민이 될 수 있겠지만, 비평가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작품들,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의미를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바로 쉬클로프스키의 '낯설게 하기' 개념에서 시작되는 현대 비평의 형식주의적 전화이 지시하는 것이다. 형식주의는 비평가에게 새로운 일무를 부여한다. 그것은 닳고 닳은 의미를 버리고 새로운 의미를 발굴하라는 명령, 즉 '나를 놀라게 하라'는 명령이다. 


이와 똑같은 명령이 '텍스트'와 '텍스트성(textuality)'이라는 바르트의 사고에도 나타나있다. 그것은 비평가는 다의적 문학 작품의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의미의 창조자가 된다. 바르트는 문학의 목표가 '하나의 의미'가 아닌 '의미' 자체를 세계에 부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비평은 의미를 바꾸고 재배치하는 것, 그리고 의미를 덧붙이고 제거하고 증식시키는 것이라는 주장은, 비평가가 실로 비평을 무효화시키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는 말과 같으며, 따라서 비평을 취향의 왕국에 다시 회부해야 한다는 말과도 같다. 익숙한 의미들을 식별하는 것은 취향이 하는 일이며, 익숙한 의미를 너무 익숙하다고 판별하는 것도 취향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익숙한 어떤 것을 통속적이고 경박한 것으로 만드는 것도 취향의 이데올로기이다. 바르트의 형식주의는 비평가에게 작품의 '메시지'를 재구성할 것이 아니라 그 '체계(그 형식과 구조)'를 재구성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명백한 것을 피하는 해방이자, 고상한 취향을 무한히 드러내는 몸짓이다. 수전 손택, <강조해야 할 것> 중 "글쓰기 자체 : 롤랑 바르트에 관하여"


패션의 영역은 지극히 취향적이다. 어떤 취향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 유행을 만들기도 한다. 그런데 그 유행은 곧 사그라들고 다른 유행의 흐름으로 옮겨간다. 새로운 가치가 생겨나고 그 가치가 비평되고 그 비평을 통해 또 다른 가치가 생겨나는 일, 우리 그런 흐름을 이끄는 비평가인 샘이다. 누구나 자기 표현을 통해 비평의 자유를 누릴 수 있고 그 비평의 주체가 크고 작은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대중이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비평을 무효화 시키는 데 어떤 기여를 했는지에 따라 유명해질 수 있고 또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거다. 노출 된 비평가의 말을 따르느냐 그 비평에 또 다른 비평을 할 것인가 우린 그 계속되는 릴레이에 함께하고 있다 생각하게 된다. 글쓰기는 그런 고상한 취향을 마음껏 즐길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바르트가 생각하는 문학의 유토피아는 사르트르와는 정반대되는 윤리적 성격을 보여준다. 바르트의 유토피아는 욕망과 글읽기, 욕망과 글쓰기 사이의 관계에 대한 사고에서 드러난다. 그는 자기 자신의 글은 무엇보다도 욕망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쾌락', '행복', '기쁨' 같은 단어들은 그의 저작에서 관능적이면서도 동시에 전복적인 무게를 가지고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지드를 희미하게 연상시키기도 한다. 도덕주의자가 생식을 위한 섹스와 쾌락을 위한 섹스를 엄숙하게 구별하듯, 바르트 또한 무언가를 쓰는 작가(사르트의 작가관이라 할 수 있는)와 무언가를 쓴다기보다는 그저 쓰는 진짜 작가를 구변한다. 이런 자동사적 의미의 '쓰다'가 작가가 누리는 행복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자유의 모델이라는 것이다. 바르트에 따르면, 글쓰기가 자신의 바깥에 있는 어떤 것(사회적이거나 도덕적인 목표)에 참여함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넘쳐나고 복잡하며 미묘하고 관능적인 글쓰기(권력의 언어가 결코 될 수 없는)라는 행위 그 자체로인해서 문학이 대립과 전복의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수전 손택, <강조해야 할 것> 중 "글쓰기 자체 : 롤랑 바르트에 관하여"


쓰려고 노력하면 글쓰기를 잘 할 수 있을까? 아직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을 수 없다. 다만, 퍼내고 또 퍼내도 마구 솟아나는 샘물처럼 글을 쓰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고 놀랍다. 문학을 만들려 하지 않아도 삶이 문학이 되는 사람들. 쓴다는 행위가 고통이 아니라 정말 행복의 원천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삶이 주는 물고기를 건저 올려 맛있는 글로 요리를 하는 사람들. 삶의 윤곽을 관능적으로 드러내는 일. 어떤 쾌락도 그 영역을 침범할 수 없다 대뜸 말하는 일. 글쓰기를 즐기는 일. 그런 일로 행복한 사람. 내 삶의 일부를 글쓰기에 의미두려 하는 생각들. 나의 욕구의 일부가 글쓰기를 통해 충족된다 생각하는 일. 그런 삶이 내 것일 수도 있겠다 잠정 믿어보고 싶은 마음. 그런 믿음을 믿어보려 하는 마음.





바르트는 쾌락에 대해 많이 탐구했다. 브리야-사바랭의 『취향의 생리학』에 대한 에세이에서 바르트는 이것을 '욕망에 대한 위대한 모혐'이라고 일컬었다. 그는 자신이 탐구하는 모든 것에서 행복의 모델을 찾았으며, 지적 활동마저 관능적인 것과 일치시켰다. 바르트는 정신의 활동을 욕망이라 불렀고, '욕망의 복수성'을 주장하고 옹호했다. 의미는 하나가 아니다. 이런 그의 즐거운 지혜, 혹은 즐거운 학문은 자유롭고도 풍요로우며 스스로 만족하는 의식이라는 이상을 보여준다. 이런 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할 필요가 없으며 스스로 정당화할 필요도 없다. 바르트가 몰두했던 계획이나 텍스트들은 모두 이런 이항대립에 저항하는 무언가를 담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바르트는 패션을 이렇게 해석한다. 패션은 에로스가 그러하듯 모순을 가지지 않는 영역이며, 그 속에서 주체가 기쁨을 느끼는 영역이고, 의미(그리고 즐거움)가 넘치는 영역이다. 수전 손택, <강조해야 할 것> 중 "글쓰기 자체 : 롤랑 바르트에 관하여"


나의 '취향'을 대변해주는 이런 글을 만날 때마다 몸서리치게 반갑다. '사람'이면 모를까 '인간'이란 단어를 쉽게 사용할 수 없는 나의 문장들은 이들이 사용하는 단어들이 마구마구 탐난다. 누군가의 생각을 훔쳐서만이 사용할 수 있을 법한 단어들이라니. 생각에 동의할 수 있는 글들을 만나 이렇게 발췌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쾌락을 탐험 했다 아주 수줍게 표현을 도적질해 내 문장으로 옮겨 보는 것만으로도 뿌듯하다.



바르트의 글쓰기를 탐닉한 수전 손택, 수전 손택의 비평을 통해 다시 태어난 바르트. 더욱 궁금하다.


#역시읽어야해

#읽고쓰는삶멋지네

#나의취향은고상하고싶다

#멋진문장을보면설렌다

#생각을훔치는일

#문장을훔치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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