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굳찌 Feb 05. 2021

글로 돈 벌고 싶다고 쓴 지 1년 후

쓰면 이루어 진다.

정확히 2019년 11월에 브런치에 '나도 돈버는 아내가 되고 싶다'는 글을 썼다.

나도 다시 돈을 버는 경제력 있는 아내가 되고 싶은데, 돈 버는 방법은 "글"이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일기.

인기 있는 글도 좋고, 자기계발 글도 좋고, 신문에 간간히 나가는 에세이도 좋지만 그 글들이 다 "먹고살만한 돈"이 되어 돌아온다면 더 좋겠다는 희망 생각. 뭐 그렇게 속물적이냐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이유는 분명했다. 좋은 글을 쓰려면 좋은 글을 많이 읽고, 글을 많이 써봐야 하고, 피드백도 많이 받아야 하고..다 안다. 그런데 내 생각에 좋은 글은 "적절한 보상"에서 나온다.


컨설턴트로 일할 때였다.

S사 다니는 친구가 '변화관리' 기업교육 관련해 글 쓸 사람 좀 구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주변에 유능한 컨설턴트들에게 좋은 기회니까 사이드 프로젝트로 해보라고 권했지만, 사람들은 생각보다 글 쓰기를 어려워했다. 그래서 내가 썼다. 처음엔 사람을 못 구해 발을 동동 구르던 친구를 위한 우정으로 내가 하마 했다. 그 당시 내가 한가했냐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의 갑 되시는 모 대기업은 정말 쉴 틈을 주지 않고 일을 시켰다. 책임감 투철하고 자존심도 강했던 나와 동료들은 잠 잘 때만 빼고는 그냥 회사에서 살고 있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나는 당시 결혼 준비 중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 모든 걸 하고 있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변화관리 분야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어서 쉬울 거라고 착각했던 용기 덕분에 할 수 있던 일이었다. 

하지만 글쓰는 것은 또 다른 얘기였다. 밤 늦게 퇴근해 새벽 두 세시까지 전문가들이 쓴 서적을 읽고 글을 썼다. 매 주 마감마다 글을 전달해야 했는데 진짜 전쟁이었다. 이걸 내가 왜 한다고 했을까? 라고 후회할 시간 조차 없었다. 회사 일과 글 마감일이 번갈아 코 앞까지 닥쳐왔기 때문에 무조건 썼다. 


덕분에 처음으로 내가 쓴 글로 돈을 벌었다. 큰 돈은 아니었다. 월급에 비하면 보잘것 없었다. 

하지만 그 때 깨달았다. 내가 쓴 글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받으면... 없던 아이디어도 생기고, 부족한 글도 프로페셔널해지고, 없는 시간에도 글이 나온다. 

사실, 다들 그렇지 않나? 돈의 힘은 크다. 

무엇보다, 무언가를 제대로 하려면 그것으로 돈을 벌 수 있어야 한다. 

지섭오빠도 입금전후가 다르다


그 첫 시리즈 글들을 무사히 넘기고, 클라이언트 임원 보고 및 사장단 발표를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 결혼을 했다. 남들은 예단과 혼수를 고르느라 난린데, 나는 저 두 가지 일을 마쳐야만 식장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결혼식 전 날까지 출근하며 마무리를 했다. 


결혼은 나의 삶을 끝내주게 바꿔줬다. 남친은 남편이 된 후, 유학을 시작했고 나도 같이 미국에 몇 달 뒤 따라 갔다. 미국 뉴욕 시골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내 인생에 처음 찾아온 잠시의 휴식은 꿈같이 달콤했다. 그렇다, 잠시 쉬고 싶었다. 그래서 준비하던 MBA 대신 짧은 경영학과 자격증 코스에 들어갔다. 이걸 들고 2년 후에 한국에 가서 복직해야지 했다. 


그런데 인생이 마음대로 되지를 않는다. 

남편의 2년 계획이었던 미국행은 다시 5년으로 늘었다. 아이비 대학에서 자격증 코스 하나 듣고 레주메 멋지게 한 줄 늘려 돌아가려는 계획에 인생이 공격을 해왔다. 휴직하고 온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 이사님은 너무 아쉬워하셨다. 한참 컨설턴트로서 절정에 오른 시기였는데 나도 관두면서 아쉬움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결혼을 했고, 아이도 가져야 했고, 미국에서의 기회는 무궁해 보였다. 나는 기꺼이 쉬면서 기회를 타진하는 삶을 택해 보기로 했다. 



쉬는 시간은 예상보다 길어졌다. 

미국 뉴욕에 있던 우리는 서부 엘에이로 이사했고, 나는 2년간 준비 후에 교육정책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박사과정 공부가 한창이던 때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이가 태어났다. 남편은 그 사이에 취직을 했고, 새로운 도시로 이사하게 됐고, 나는 박사 논문을 남겨두고 휴학하게 됐다. 




미국에서의 세 번째 도시. 그 곳에서 나는 깊고 큰 방황을 했다. 

한참 신나게 달리던 내 인생에 '두 번의 멈춤'이 모두 남편 때문이었다는 생각에 심하게 싸우는 날도 많았다. 남편이 미웠다. 원망스러웠다. 아이를 사랑하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을 해도 불만족스러움이 채워지지가 않았다. 마음에 드는 친구도 없었고, 그 도시도 싫었고, 사는 집도 싫었고, 다 싫었다. 


그러다가 이렇게 열정적으로 원망만 하면서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다 포기하고 살 때쯤, 깨달았다. 

사람은 생긴대로 살아야 한다는 진리. 어쩌면, 깨달아 봤자 소용 없었기 때문에 포기하고 있었던 지도 모른다. 그러다 다시 일을 시작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영주권이 나올 무렵이었던 것 같다. 물론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오는 기회 안막겠다는 생각, 이왕이면 잘할 수 있는 걸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그렇다고 20대처럼, 마구잡이로 다 해보면서 할 일을 찾기엔 나이가 좀 있었다. 누구는 파이어(FIRE)족이 되겠다면서 조기 은퇴도 하는 세상이었다. 내 나이는 앞자리가 4로 넘어간 시간이었다. 하지만 20대처럼 무작정 하겠다고 결심했다. 뭐 무작정 나서는 것 외에는 별달리 뾰족한 수가 없기도 했다. 


그제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었다.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하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식상한 진리. 

잘하는 거 해야 한다, 좋아하는 거 해야 한다, 이런 말들.. 예전에는 신선놀음하듯, 탁상공론하듯 말했다면,

‘어른'들은… 진정 그래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그랬다. 진정으로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해야 다시 일어날 수 있고, 끝까지 완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그저 그런데 잘하는  같은 착각그런 배부른 착각 따위는 이제 없다. 

사회의 평가는 물론, 스스로도 훨씬 더 냉정해진다.

그렇게 내게 남은 것, 그리고 찾아온 것이 쓰는 일이었다.


#to be continued....

  



매거진의 이전글 나도 돈 버는 마누라가 되고 싶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