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 마침내, 두 개의 햇살을 품은 나무가 되어
낯선 이방인들이 내어준 온기를 통과하며, 나는 비로소 내 안에 스며든 두 개의 햇살을 마주한다.
'뉴질랜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과일, 키위(Kiwi fruit). 하지만 그 솜털 보송한 과일의 진짜 뿌리가 실은 아시아의 낯선 땅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1904년, 중국 내륙을 여행 중이던 뉴질랜드의 한 여교사(이자벨 프레이저)가 가방 속에 담아 온 것은 고작 까만 씨앗 몇 알이었다. 본래 ‘미후도’라 불리던 이 작은 존재는 그렇게 지구 반바퀴를 돌아 타향에 심겼고, 뉴질랜드의 흙과 바람 속에서 다시 피어났다.
위대한 정착은 이처럼 때로 가장 가벼운 모습으로 찾아온다. 그 가벼웠던 씨앗이 낯선 풍토를 견디며 뿌리내리자, 이곳 사람들은 애정이 담긴 키위새의 이름을 빌려 ‘키위’라는 새로운 이름을 선물했다. 그 이름 하나로, 낯선 이방인이었던 과일은 어느새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다.
참으로 절묘한 운명이다. 여행자의 주머니 속에서 시작되어 마침내 그 땅의 이름이 된 과일. 마치 고향을 떠나 먼 이국땅에 정착해 제2의 삶을 일구어낸 어느 이민자의 삶과 꼭 닮아 있지 않은가.
이방의 땅에서 세계적인 과일로 거듭나기까지, 키위 역시 숱한 몸살을 앓았을 것이다. 물설고 낯선 기후, 달라진 토양에 적응하기 위해 스스로를 바꿔야 했던 시간들. 그리고 그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여 준 이곳 사람들의 열린 품이 있었기에, 키위는 비로소 이 땅의 이름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는 세 가지 ‘키위’가 산다. 날지 못해도 오롯이 이 땅에 머무는 키위새, 두 세계의 햇살이 길러낸 키위 과일, 그리고 이 땅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키위(Kiwi). 이름 하나로 세 가지 생명, 곧 자연과 사람이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셈이다.
상담실에서 만나는 이민 1.5세대들은 종종 깊은 한숨 속에 이런 고백을 털어놓곤 한다. “저는 한국인도, 그렇다고 키위도 아닌 애매한 사람 같아요.” 집에서는 익숙한 우리말과 밥 냄새에 둘러싸여 있지만, 문밖을 나서는 순간 영어와 마오리의 문화 속을 유영해야 하는 아이들. 외양은 영락없는 한국인이지만 생각의 결은 어느새 이곳의 정서를 닮아있다. 그들은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늘 ‘경계인’의 그림자를 안고 살아간다.
부모 세대가 ‘코리안’이라는 단단한 뿌리 위에 서 있다면, 자녀 세대는 그 뿌리와 가지 사이, 흔들리는 경계 위에서 길을 잃곤 한다. 내가 누구인지, 또 어디에 속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그 모호함은 때로 정체성의 혼란이 되어 마음을 찌르는 가시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들 사이에서 ‘코위(Kowi, Korean-Kiwi)’라는 새로운 이름이 피어났다. 한국인의 정체성과 키위의 유연함을 아우르는 이름. 어느 날, 한 키위 동료에게 이 단어를 소개했더니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답했다. “정말 매력적인 이름이네요! 그럼 중국계 친구들은 ‘치위(Chiwi)’가 되는 건가요?”
그 유쾌한 대화와 웃음 끝에, 문득 묵직한 울림 하나가 마음에 남았다. 본래 미후도라 불렸던 낯선 과일이 ‘키위’라는 이름을 얻어 다시 태어났듯, 이들 역시 스스로 정체성을 재해석하며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다만 그 과일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이름은 타인이 건넨 '선물'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고통스러운 경계 위에서 길어 올린 '존엄한 이름'이라는 사실이다.
키위 과일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겉모습은 거칠고 투박한 갈색 털로 덮여 있지만, 그 속에는 레몬보다 짙은 비타민을 품은 선명한 초록빛, 혹은 찬란한 금빛이 숨어 있다. 그 새콤달콤함은 홀로 있을 때도 빛나지만, 다른 과일과 어우러질 때 서로의 고유함을 지켜주며 더 깊은 풍미를 끌어낸다.
그 모습은 내게 조용히 말해주는 듯하다. 경계에 서 있다는 것은 단순한 애매함이 아니라, 두 세계를 연결하는 힘이자 이미 깊어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거친 껍질 안에서 스스로의 세계를 따스하게 품어낸 뒤에야, 비로소 내면의 가장 아름다운 빛깔을 피워낼 수 있다고.
나 역시 이 흔들리는 경계 위에서, 두 세계의 햇살을 품고 나만의 결로 조용히 익어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