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되지 않는 진심은 없다

2부 | 서툰 언어 너머, 마음을 잇는 풍경

by 그루 햇살나무

외국어가 비교적 쉽게 몸에 밴다는 분기점이 12세 이전이라 들은 적이 있다. 물론 그 나이가 절대적인 경계일 리는 없다. 언어에 노출되는 빈도나 사용 환경, 학습 동기와 방식 등 수많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린 시절이 유리하다는 건 어쩌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성인이 되어 유학이나 이민을 택한 이들은, 낯선 언어의 숲에서 자신의 진실을 번역해야 하는 고통을 감내하며, 소통의 장벽이라는 묵직한 숙제를 안고 살아간다. 한국에서 외향적이고 말 잘하던 사람들도, 외국인들 사이에 서면 금세 침묵을 배운다. 익숙한 언어의 울타리를 벗어난 자리에선, 미소 하나에도 조심스러움이 묻고, 말 한마디에도 망설임이 깃든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오면, 별다른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몸이 무겁다. 제대로 알아듣지도, 마음을 다 전하지도 못한 채 흘려보낸 하루, 낯선 언어 속 표지판을 읽어내는 수고로움까지... 그것이 이국의 삶이 남기는 조용한 피로이자, 말보다 깊은 침묵의 무게다.

아마도 그런 심리적 배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외국인과의 우정은 어딘가 보이지 않는 벽을 지니기 마련이라, 나 역시 그 한계를 당연하게 여겼다. 이러한 선입견이 흔들린 것은 제니를 만난 후였다.

일로 맺어진 그녀와의 관계가 마무리될 즈음, 그녀는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다면, 이제부턴 친구로 때때로 만나면 어때요?” 공과 사의 관계를 비교적 선명히 구분하는 이곳의 보편적인 정서 속에서, 이 제안은 꽤 낯선 초대였다. 하지만 그동안 그녀가 보여준 언어와 태도에서 느껴진 따뜻함과 존중 덕분에, 나는 흔쾌히 좋다고 답했다. 그 후로 그녀는 3-4개월에 한 번쯤, 딱 부담스럽지 않을 간격으로 연락해 차 한잔을 청했다.

신기하게도, 나의 서툰 콩글리쉬가 그녀에게만은 유독 잘 통했다. 그녀와 이야기할 때면, 낯선 언어 앞에서 늘 느끼던 긴장감이 한결 옅어졌다.


한번은 한국인 지인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그녀를 만났는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헤어지려 일어나니 카페 주인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외국인과 두 시간 넘게 그렇게 자연스레 이야기를 할 수 있나요?” 그녀는 내가 마치 영어의 장벽을 넘어선 사람인 듯 바라보았고, 콩글리쉬와 바디랭기지 덕분이라는 나의 말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주인의 눈에 비친 모습과는 달리, 내 영어 실력이 갑자기 늘었을 리도 없고 영어 울렁증도 여전히 그림자처럼 남아있다. 그럼에도 제니와의 대화는 어찌 그리 자연스러워 보였을까?

우선, 우리 사이에는 기본적인 신뢰의 기반이 어느 정도 있었다. 둘 다 누군가의 삶에 귀 기울이는 일이 익숙했고, 그만큼 경청과 존중의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공통분모가 전부는 아니었다. 직업이 같다고 해서 모든 이와 제니처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결국 더 큰 이유는, 서로의 세계를 진심으로 알고 싶고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열린 마음’이었다.

그녀가 먼저 친구 관계라는 손을 내밀었고, 나 역시 그녀의 낯선 초대에 기꺼이 마음을 열었다. 그러니 소통이 막힐 때면 우리는 다른 표현으로 다시 설명했고, 손짓과 발짓 혹은 사전이라도 찾아가며 서로의 마음을 번역해 갔다.

흥미롭게도 그녀는, 같은 나라 사람들과 있을 때 보다 내 앞에서 더 솔직할 수 있다고 했다. 나 또한 그랬다.


우리 둘은 ‘이방인’이라는 공통의 언어 속에서 오히려 안전함을 느꼈고, 그 낯선 언어의 연대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마음껏 외칠 수 있는 우리만의 '대나무 숲'이 되어준 셈이다.

그렇게 시간이 쌓여, 이제는 어느덧 십여년을 함께한 친구가 되었다. 여전히 자주는 아니어도, 우리에게는 시간을 뛰어넘는 깊은 마음의 대화가 늘 준비되어 있다.

제니를 통해 깨닫는다. 문화와 배경은 달라도 저마다 짊어진 삶의 무게는 어디에나 있으며, 사람은 결국 같은 결의 외로움과 따뜻함을 품은 존재라는 것을. 또한, 차이는 관계를 밀어내는 벽이 아니라, 서로에게 다가설 수 있는 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