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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_어느 실버타운의 폭탄 돌리기

세입자 수필 <2년에 한 번>

by 집순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았던 집을 세어봤습니다. 모두 16곳. 각 집마다 머무른 기간은 다 다르지만 태어난 순간부터 2년에 한 번 꼴로 이사를 다닌 격입니다. 앞으로는 조금 더 한 곳에 오래 머물 수 있게 될까요? 죽을 때까지 저는 몇 개의 방을 거치게 될까요.


끊임없이 집을 구하고 짐을 싸고 풀면서 원망도 많이 했지만 때로는 비를 피할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한 번쯤 그 모든 방들에 대해 적어보고 싶었습니다.



너네 집이니?


07_어느 실버타운의 폭탄 돌리기


“와- 어떻게 이런데 이런 집이 있지?”


지하철 역에서 내려 큰길을 따라올 때만 해도 별 감흥이 없었다. 즐비한 노점이며 검은 봉지를 몇 개씩 들고 길을 걷는 사람들로 동네는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골목으로 접어들자마자 한갓진 주택가가 눈 앞에 펼쳐졌고,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짙푸른 녹음이 나타났다. 시골스러운 내 취향에 딱 맞는 풍경이었다.


동네가 뒷동산과 만나 끊어지는 바로 그곳에 내가 그날 보기로 한 집이 있었다. 외관이 깨끗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의 연립 주택이었다. 신이 나서 집으로 뛰어들어 갔다. 입구의 계단을 밟을 때마다 '가을엔 단풍이 예쁘겠지', '친구들을 초대해서 베란다에서 고기 구워 먹어야겠다'하는 생각이 퐁퐁 솟아올랐다.


“야… 여기 분위기 좀 이상하지 않아?”


하지만 건물 1층으로 들어서자마자 기이한 풍경이 펼쳐졌다. 보통 연립주택이라면 101호, 102호 이런 게 있어야 할 자리에 텅 빈 안내데스크와 불 꺼진 식당, 매점 같은 게 흔적만 남아있었던 것. 복도에 굴러다니는 휠체어 몇 대가 을씨년스러움을 더했다.


‘돌아갈까?’ 잠깐 생각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대체 어떤 꼴의 집인지 보기나 하자.’


“계세요?”

“네 잠시만요-”


30대 초반쯤 돼 보이는 여자가 문을 열어줬다. 집 내부는 암울했던 1층과 달리 정말 으리으리했다. 방이 두 갠가 세 개에 넓은 거실과 아까 그 녹음이 한눈에 들어오는 베란다. 그리고 디귿자형 주방에 깨끗한 화장실까지. 그런데도 보증금은 이상하리만치 저렴했다. 관리비가 월세 수준으로 비싸긴 했지만.


“저기요, 1층 보니까 그냥 집은 아닌 것 같던데… 혹시 여긴 원래 뭐였어요?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아… 실버타운이요.”


그랬다. 그곳은 병원이 아니라 망한 실버타운이었다. 건설 업자들이 대출을 잔뜩 받아 실버타운을 지었지만 생각보다 잘 팔리지 않았거나, 아니면 사기꾼이 투자자들의 돈을 가지고 공사 중간에 날랐거나.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이 실버타운은 원래의 계획이 어긋나자 일반 세입자를 허겁지겁 받았던 것 같다. 월세 수준으로 비싼 관리비도 아마도 실제 관리비 용도가 아니라 현금 융통을 위한 조치였을 것이다.


그런 집이니 당연히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을 터였다. 새로운 세입자가 들어와서 보증금을 줘야만 기존 세입자가 보증금을 빼서 나갈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내가 있을 땐 별일 없기를’하는 마음으로 다음 세입자에게 ‘보증금 폭탄 돌리기’를 하고 있었던 거다.


정말 바보 같지만, 솔직히 그때까지만 해도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그만큼 조건이 좋은 집은 절대 영원히 그 가격에 만날 수 없을 것이었다. 그 집보다 먼저 보았던 누추한 집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창문 밖으로 보였던 숲도 계속 아른거렸다.


그때 함께 간 친구가 어깨를 툭 쳤다.


“집순. 여기 정말 안 되겠다.”


친구가 가리킨 엘리베이터 벽면에는 관리비가 수십 만원씩 밀린 가구 리스트가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마음을 비우고 확인사살 차원에서 동네 부동산을 들러봤다.


“저기 저 집이요. 혹시 중개 안 하세요?”

“안 해요.”

“왜요? 집 좋던데.”

“위험해서요.”


단순 비교는 어렵겠지만, 신축 원룸이나 오피스텔 중에서도 이 실버타운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것들이 많은 것 같다. 실제로 집을 구하던 중 등기부에 빚이 잔뜩 끼어있는 신축 원룸을 소개하면서 어떤 중개업자가 “새집이라 빚은 많은데 임대인들 다 들어오면 금방 해결될 일”이라고 회유하는 걸 거절한 적이 있다.


업자들은 빚을 내서 집을 짓고 세입자들은 빚을 내서 그 집에 들어간다. 하지만 어느 한쪽이 빚을 제대로 갚지 못하면 최악의 경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폭탄이 터지는 것이다. 그때는 중개인도, 집주인도 누구도 책임을 져주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 실버타운에는 젊은 사람들의 흔적이 곳곳에 가득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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