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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_운명의 집을 알아보는 법

세입자 수필 <2년에 한 번>

by 집순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았던 집을 세어봤습니다. 모두 16곳. 각 집마다 머무른 기간은 다 다르지만 태어난 순간부터 2년에 한 번 꼴로 이사를 다닌 격입니다. 앞으로는 조금 더 한 곳에 오래 머물 수 있게 될까요? 죽을 때까지 저는 몇 개의 방을 거치게 될까요.


끊임없이 집을 구하고 짐을 싸고 풀면서 원망도 많이 했지만 때로는 비를 피할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한 번쯤 그 모든 방들에 대해 적어보고 싶었습니다.




난 곤란했다....


08_운명의 집을 알아보는 법


“얼굴은 똑같지만 윤곽이 미묘하게 다른 두 꽃미남이 갑자기 동시에 고백을 해온다면 어떨 것 같은가.”
“야마시타 씨 저와 결혼해주십시오!”
“난 곤란했다.”


내가 너무너무너무 좋아하는 만화책 <지어보세, 전통가옥!>은 <천재 유교수의 생활>로 알려진 만화가 야마시타 카즈미가 일본 전통 가옥을 짓기로 결심하면서 생기는 실제 에피소드를 3권의 책으로 펴낸 것이다. 언젠가 한옥에서 살고 싶다는 로망에 흠뻑 빠져있는 나로서는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스토리였다. 책 속에서 작가가 집을 짓기 위해 있는 대출 없는 대출을 끌어 모으고, 구청에 낼 산더미 같은 서류를 작성하는 모습을 보면 때로는 처절하다. 그 점이 매력 포인트다. 현실감이 충만하달까…


특히 작가가 집을 지을 ‘운명의 터’를 찾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평소 내가 생각한 것과 완전히 같은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애타게 집터를 찾던 중 건축가와 형부가 각각 찾아온 두 개의 집터 사이에서 고민에 빠진다. 작가는 비슷하게 잘생긴 두 남자가 동시에 구애를 하는 상황에 비유한다. 그렇게 두 집 사이에서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있을 때 반전이 일어난다. 우연히 길을 걷다가 마주친 공터를 보다가, 또 다른 남자가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된 것. 작가는 그 집터가 자신이 그렇게 찾아 헤매던 운명의 집터임을 알아본다.


너무 낭만적인가? 하지만 난 정말로 그런 것 같다.

얼마 전에도 1인 가구 친구 셋이 모여 ‘운명의 집’에 대한 이야기로 비슷한 수다를 떨었다.


“집 구하다 보면 딱 느낌 오잖아.”

“맞어 맞어.”

“어떤 집은 구석구석 살펴보고 ‘이만하면 됐다’ 싶은데.”

“어떤 집은 들어가자마자 알지. 바로 여기라는 걸.”


나는 14번째 집과 15번째 집에 들어갔을 때 그런 느낌을 받았다.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자마자 ‘바로 여기’라는 기분. 어떤 기준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한눈에 알아본다는 게 신기하다. 14번째 집은 집을 구하기 시작하자마자 본 집이었고, 15번째 집은 많은 집을 돌아다니다가 만난 집이었으니 꼭 한 참 헤매다 만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운명이라는 게, 어떤 운명인지는 모를 일이다.


내가 너무 좋아했던 15번째 집에서 나는 쫓겨 나왔다. 집주인으로부터 어느 날 밤 전화가 걸려와 건물을 재건축할 테니 나가 달라고 했다. 집과 관련해 처음 겪은 시련이었다. 태양이 작렬하는 한여름 깊은 우울 상태에 빠져 발을 질질 끌며 집을 구하러 다녔다. 정말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16번째 집을 찾았을 때는 ‘그래 여기다’가 아니라 ‘이만하면 됐다’였다. 솔직히 맘에 안 드는 구석이 너무 많았다. 혼자 있는 걸 그렇게 좋아하는 내가 친구에게 “집에 혼자 있기 싫으니 며칠만 있다 가라”라고 부탁했을 정도니까.


16번째 집에서 보낸 시간도 어느덧 1년 하고도 3개월이다. 운명의 집에서의 결말이 나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제는 ‘이만하면 좋은’ 집에서 ‘이만하면 좋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조용한 방에 앉아 차를 마시며 운명이란 것이 다시 생각해 본다.


'어쩌면 운명을 첫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게 바보 같은 것 아니었을까'하고.

한참 지나서야 ‘그 집과의 인연이 참 깊었구나’하고 어렴풋이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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