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입자 수필 <2년에 한 번>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았던 집을 세어봤습니다. 모두 16곳. 각 집마다 머무른 기간은 다 다르지만 태어난 순간부터 2년에 한 번 꼴로 이사를 다닌 격입니다. 앞으로는 조금 더 한 곳에 오래 머물 수 있게 될까요? 죽을 때까지 저는 몇 개의 방을 거치게 될까요.
끊임없이 집을 구하고 짐을 싸고 풀면서 원망도 많이 했지만 때로는 비를 피할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한 번쯤 그 모든 방들에 대해 적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라틴어 수업> 가운데, 신약성서 마태오복음 6장 34절
“모든 게 소유에서 공유로 넘어가는 시대잖아요. 집 한 채 사서 한평생 아등바등 주택담보대출 갚고 늙어서는 그 집 한 채에 기대 살고. 그러다 죽으면 자식들한테 물려주고. 그거 다 옛날 옛적 얘기죠.”
내 집을 갖고 싶다는 말에 그가 정신 차리라는 듯이 말했다.
“집도 결국엔 짐이에요. 그 돈으로 차라리 다른 걸 하는 게 수익으로 봐도 훨씬 나을 걸요?”
그래, 그의 말이 맞다. 이미 오래전부터 ‘내 집 마련의 꿈’ 같은 말은 80-90년대에나 회자되던 유행어처럼 취급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촌스럽고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해도 갖고 싶은 건 갖고 싶은 것이다. 갖고 싶다는 희망이 죄는 아니잖아.
“조용하고 볕 잘 드는 내 집이 하나 있다면, 하기 싫은 직장 생활 같은 거 다 때려치우고 최소 생활비만 벌면서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뭐야.. 결국엔 회사 때려치우고 싶다는 거네.”
“그리고. 이대로 혼자서 늙는다면 다른 건 몰라도 집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지팡이 짚을 힘도 없는데 다달이 월세 내야 하면요? 어느 날 갑자기 방 빼라고 하면요?”
“참 신기해 아무튼.”
이렇게 적고 나니 서른에 머리 꽁꽁 싸매고 할 고민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한동안은 그런 생각 때문에 정말이지 괴로웠다. 왜냐하면 나 스스로도 그런 꿈이 실현되기는 쉽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신혼부부 두 사람이 9년간 월급을 한 푼도 안 쓰고 모아야 서울에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한다는데... 나는 혼자니까 단순 계산으로 18년. 그때쯤이면 아마 나는 직장 생활을 하고 싶어도 못하게 되겠지? 바보 같은 생각의 특징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더 바보 같은 생각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정말 바보 같았다.
그럼에도 이런 나를 스스로 이해하려 노력했다. 어릴 때 이사를 너무 많이 해서 그런 걸까... 돌이켜보면 그땐 친구들과 헤어지는 게 언제나 무덤덤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건 착각이었다. 결코 괜찮지 않았다. 많은 이사 중에는 분명 기다려지는 이사도, 행복한 이사도 있었지만 그저 지치고 막막하기만 한 이사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나 나는 “난 적응력이 강하니까”하고 무던히도 무던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도 착각이었다. 그래, 집착할 수 있다. 집착해도 된다. 그럴 수 있지 뭐...
다행히, 요새는 집에 대한 생각을 예전만큼 하지 않는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미래 때문에 지금을 희생하는 건 스스로를 갉아먹는 짓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젠 당시에 했던 바보 같은 고민마저 “아, 스스로 완전히 납득하려고 그렇게 머리 아프게 고민했나 보다”하고 생각해 버린다. 그리고 날마다 주문처럼 왼다.
‘오늘은 오늘만큼의 걱정만. 딱 오늘만큼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