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영화과에 막 편입했을 때만 하더라도 단 3개월 만에 영화 현장에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 못 했다. 학과에서 그나마 그림을 그릴 줄 알던 나를 콘티 작가로 원하던 분이 계셨고, 그렇게 스크립터까지 겸하게 되었다. 그랬던 작품이 얼마 전 부천영화제에 상영된다고 했을 때, 내 첫 영화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는 이 작품을 상영관에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묘하게 벅차올랐다. 뚝심 없이 부산스러운 요즘의 나에게 정말 필요했던 소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정후는 바다에서 엄마의 뒷모습을 닮은 '영'을 발견하고 사진을 찍는다. 정후의 친구를 통해 '영'은 정후의 아버지에게 사진을 배운다. 이후 상일이 병으로 죽고 '영'도 정후의 곁을 떠난다.
(2021년 25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나의 아버지는 사진작가였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다른 일을 하셨다지만, 집 안에는 유난히도 카메라나 필름통이 많았다. 물론 지금은 그게 다 어디를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나마 구석에 남았었던 니콘 f601이 내 손에 들어와 여전히 쓰이고 있다.
영화와 사진 두 가지 다 기록이라는 측면에서는 맥락을 같이한다. 무엇을 찍든 찍는 사람이 기록하고 싶었던 것이 결과물에 담겨있고, 결과물은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영원히 존재할 수도 있다. 영화 속 "사진을 왜 찍고 싶은 거지?"라고 묻는 '상일'의 질문에 "붙잡고 싶어서요."라고 대답하는 '영'의 모습은 그 영원함의 욕심이 낳은 대답일 수도 있지만,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솔직하지 못한 인물들의 모습은, 응당 모든 게 모호한 우리 인생 속 유령 같은 순간을 표현하는 게 아닌가 싶다.
사진의 힘은 순간을 기록하는 것에 있다. 그 순간의 기록이 누군가에게 감정을 전할 수도, 잊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할 수도 있는 만큼 사진 한 장이 가진 힘은 생각보다 크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에 의한 힘인지, 그 시간 속 무언가에 의한 힘인지는 모호하다. 대신 그 힘은 '영'에게 낡은 어머니의 사진으로 존재했고, 그 사진을 잃어버리자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인 것 마냥 '정후'의 곁을 떠나게 만든다. '정후' 또한 사진의 힘이 '상일'을 죽게 만들었고(죽게 만들었다고 해야 할지, 진실을 마주하지 못했다고 해야 할지), '상일' 또한 마찬가지다.
'정후'에게 있어서 사진은 후회였을지도 모르겠다. 모든 사진이 진실을 내포하지는 않는다. 같은 사진 한 장으로 누군가는 A를 기억할 수도 B를 기억할 수도 있다. 그렇듯 기억과 진실도 각색되기 마련이다. 영화는 이야기 말미에 슬라이드 영사기 속 어머니의 생전 사진으로 '정후'에게 진실을 전달하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영'이라는 존재는 그 존재가 진실이었는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홀연히 사라진 존재로 남았다(물론 마지막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인물은 누가 봐도 '영'이지만). 영화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진실을 마주하는 인간의 자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 싶다. 진실이 두려워 사진을 꾸며내는 인물과(정후), 진실을 알면서도 그 사실(사진)을 전달하지 못하는 인물(아버지), 사진 속 어머니와 함께 있던 등대를 찾아다니며 시간을 마주하려는 인물(영) 모두 지나간 기억에 얽매이다 결국 누군가의 죽음과 빈자리를 통해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 진실이 동반하는 것은 후회뿐이다. 사진이 이들에게 남긴 것은 기억도 순간도 아닌 그저 후회뿐.
'상일'은 사진을 찍으려거든 결정적인 순간에 잠깐 기다리라고 한다. 이 한 문장은 사진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생을 대할 때도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닌가 싶다.
드라마, 영화 촬영을 하다 보면, 정말 별 것도 아닌 것 같은 샷에 심혈을 기울이는 촬영 감독님들을 뵐 때가 있다. 기다리는 스탭들 입장에서야 왜 저렇게 열심히 찍을까 싶지만, 결과물을 보면 정말 좋을 때가 많았다. 뭐가 좋은지는 말로 설명 못 하겠다. 그냥 그 순간 그 샷으로 내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만 같은 그런 샷들이었다. 촬영 감독님들은 그런 것들을 캐치하는 사람인 것인가 하고 매 촬영마다 감탄하곤 했지만, 한 편으로는 그것이 내 퇴근 시간을 미루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한 숨만 푹푹 쉬는 내 모습도 마주하게 된다.
이야기의 주 배경은 부산이다. 부천 영화제 GV당시 왜 하필 부산이었냐라는 질문에 감독님은 부산에서 지원받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이런 이야기에 부산만큼 어울리는 곳이 있을까 싶었다. 부산은 바다를 마주하는 곳이다. 이런저런 것들이 떠밀려오기도 하고, 떠내려가기도 한다. 누군가에게는 휴가지겠지만 도피처일 수도 있다. 서로 각기 다른 감정들이 쓸려오는 파도처럼 부서지듯 사그라들 수도, 거대한 파도처럼 잠식하기도 하는 곳.
만든 지 2년 만에 상영관에 걸리다 보니 잊고 지내다시피 했는데, 영화제에서 다시 볼 수 있어 감동이었던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