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섯살무렵의 몇가지 기억이
어렴풋하게 남아있다.
기억력이 썩 좋은편은 아닌데도
그 어린나이의 기억이 남아있는 이유는
내인생의 첫번째 위기(?)였기때문이다.
훗날 어느정도 컸을때 알게 되었던 일이지만
부모님은 어린 나를 외가 친척에게 양녀로 보냈었다.
시골 깡촌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우리집은
그만큼 아이들을 키우기가 힘들었는지
어린 나를 부산 큰이모댁으로 양녀로 보냈다.
심지어 큰이모는 엄마와는 배다른 형제였으니
그렇게 가까운 친척도 아니었다.
부산이라는 대도시에서 그냥 평범하게 사는
금슬 좋은 부부였고, 자식들은 어느정도 자라
어린 아이 하나쯤은 거둘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으신 분이셨다.
여전히 그집에 대한 기억 몇가지가 남아있다.
너무 어릴때 기억이라 그게 100%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만 분명한건
그 친척 분들은 나를 귀여워해주셨지만
'행복하다' '여기 오래 있고 싶다'의 기분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긴 골목길을 따라 어딘가로 뛰어가던 기억이 난다.
집앞 하수구에 뭔가를 쑤셔박던 기억도 난다.
짧은 기억이지만
그곳에서도 외로웠던건 마찬가지다.
누군가 나를 다정하게 돌봐준 기억은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연달아 파편처럼 떠오르는 기억은
깊은 밤 장례식을 치르고 있던 외갓집 장면.
내 기억속에는 전혀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지만
그날은 외할아버지의 장례식이었다는 것을
훗날 알게 되었다.
전화 통화도 편지도 힘들었던 그 시절
나를 친척집에 양녀로 보내고
어머니는 후회를 하셨을까.
양녀로 보낸 후,
처음으로 외할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엄마는 어린 막내딸을 다시 만나셨다.
오랜만에 만난 엄마를 그리워했던것일까.
나는 엄마를 부여잡고 떨어지지 않았다고 하셨다.
그리고 엄마에게
큰이모가 술이랑 고춧가루만 먹인다고
생떼를 부렸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절실한 기독교인 큰이모부부가
술도 전혀 드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지만,
어린 나의 생존본능과 같은
거짓말을 듣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의 참뜻을
어미로써 충분히 알수 있었겠지.
그리고 큰이모부부도
나의 여러 돌출행동에
여러 걱정을 하셨다고 한다.
어린 내가 이모가 아끼는 화초들을
모조리 꺾어서 하수구에 쑤셔 박거나
잘 웃지도않고
잘 먹지도 않는다고 하셨단다.
그렇게 외할아버지의 장례식 덕분에
나는 부산 큰이모의 양녀에서
다시 시골 소나무집 막내딸로
돌아볼수 있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올수 있어
행복했을까?
다시 집으로 돌아온 날의 기억은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분명 행복했을것이다.
비로소 안심했을것이다.
드디어 엄마에게 돌아왔으니까.
한참의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 무렵
큰이모의 부고를 들었다.
내가 만약 큰이모의 막내딸로 살았다면
고등학생때 두번째 엄마를 잃는
아픔을 겪었겠지.
첫번째 엄마는 나를 양녀로 보냈고
두번째 엄마는 고등학교때 죽는 삶이라..
생각만해도 슬프고 슬프다.
엄마가 한때 나를 양녀로 보냈다고 해서
엄마를 미워해본적은 없다.
잠깐의 이별이었기때문에
그것에 대한 서운함도 남아있지 않다.
다만 내가 한아이의 엄마가 되고
맞벌이를 하면서 아이를 키워보니
비로소 그때의 엄마가 조금은 이해되더라.
얼마나 힘드셨을까
오죽하면 그러셨을까
나를 보내고 마음편한 날이 있으셨을까
다시 만나 그래도 다행이다 안심하셨을까
사는게 힘들어도 키워내는게 힘들어도
함께 해서 다행이다 감사하셨을까
외할아버지도
어린 나의 상황이 측은하셨을까
힘들게 사는 딸의 잘못된 선택을 바로잡아 주고 싶으셨을까
그러셨다고 믿는다.
그 덕분에 나는 잘컸고
잘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