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내가 이 터널을 지나게 되자, 의대 시절의 한 친구가 생각났다. 결석을 밥 먹듯이 하던 친구. 이유를 물으니. ‘그냥…. 침대에서 나올 수가 없어. 그게 너무 힘들어’라고 힘없이 대답하던 친구.
당시에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친구의 말. (중략) 말로는 위로한다고 했지만 진실성 없는 위로를 친구가 눈치 채지 못했을 리 없고, 아마 그것이 친구를 더 외롭게 했을지도 모른다.(p.417~418)
류희주, ‘병명은 가족’ 중에서
직장 다니는 딸의 육아와 살림을 도와주시던 엄마가 연로하신 데다 거동도 불편하셔서 이제는 내가 살림을 전담하고 있다.
주말에 인터넷으로 일주일치 장을 보는데 다음 날 새벽 배송 온 식재료들을 냉장고에 정리하는데만 거의 한 시간이 걸린다. 다 하고 나면 하루의 에너지 절반은 쓴 듯 힘이 빠진다.
문득 예전에 시가에서 가져온 김치를 정리하면서 힘들어하시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는 “사돈어른, 김치 하시느라 정말 힘드셨겠다. 그런데 이거 정리하는 것도 진짜 보통이 아니네.”라는 엄마의 말을 가볍게 흘려 들었다.
만드는 사람도 있는데 정리만 하는 게 뭐가 그렇게 힘드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세상에 쉬워 보이는 일은 있어도 쉬운 일은 없다. 그런데도 나는 엄마의 말에 진정한 공감을 표하지 못한 철없는 딸이다.
사람은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못한 일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공감하기 어려운 걸까. 우리가 세상만사를 직접 경험할 수는 없는데 타인에게 내 힘듦을 드러내는 일은 헛수고인 걸까.
조안 k. 롤링은 하버드대 졸업식 축사에서 ‘상상력의 가장 큰 위력은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다른 사람들의 경험에 공감할 수 있도록 해주는 힘’이라고 했다.
나의 상상력은 아직도 많이 빈약하다. 나와 가족, 타인을 모두 소중히 여기고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관계에 지치고 상처 받는 일이 조금씩 줄어들지 않을까..
‘나’는 이렇게 노력하는데 ‘상대방’은 전혀 달라지는 게 없다면 나만 손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변화의 시도는 각자의 과제이니까 나는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면 된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