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화가 사라졌다

by 비니

이상하다.

화가 별로 나지 않는다. 화가 올라왔다가도 바람 빠진 풍선처럼 마음이 쭈그러진다.


아침에 일어나서 나가기 전까지 이것저것 치우느라 진이 빠진 상태에서 외출하고 귀가 후에도 손만 씻고는 집안 구석구석을 정리하느라 정작 나를 위해 써야 할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고 지친 상태로 늘어지게 된다.


엄마는 원하는 것이 다양하고 까다로운 분이다. 물론 나도 엄마의 요구를 최대한 들어 드리려고 노력하지만 체력이 따르지 않는 데다가 피곤이 누적되어 한도 초과이다. 더 큰 문제는 동생의 돌봄에 관한 부분이다. 엄마는 동생 돌봄에 있어서도 엄마의 방식을 고집하고 나는 내 스타일로 하고 싶다 보니 사사건건 부딪힌다.


이 게임의 승자는 엄마다. 최대한 잘하려고 애쓰는 데도 돌봄의 주체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불만이 쌓여 엄마의 말 한마디가 마음을 툭 건드리기만 해도 화산이 폭발한 것처럼 화가 쏟아져 나왔다.


“엄마랑은 진짜 안 맞아서 힘들어요.”

엄마에게 이렇게 호소할 때마다 “넌 참 이상하다. 모녀 사이에 맞고 안 맞고가 어디 있냐, 엄마가 말하면 그냥 알겠다고 하면 되지 왜 화를 내?”라는 대답이 돌아왔고 나는 ‘상처 입은 어린 짐승’이 되어 버렸다.

그랬는데…….. 내 안의 화는 다 어디로 가버린 걸까. 내가 아무리 어떤 점이 힘든지 외쳐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포기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분노의 감정을 느끼는 회로가 과부하로 망가진 걸까.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화가 별로 나지 않으니까 좋긴 하다. 언제까지 이 평온함을 유지할지 살짝 불안하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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