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전 일이다. 직장 후배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저도 이제 몸이 예전 같지 않아요. 체력도 약해졌고요.”
나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사람의 말에 난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나는 오죽하겠어.”
재작년에 중국에 가 있는 동생과 통화하면서 간병과 돌봄의 어려움에 대해 하소연했다.
“나도 이제 오십 중반이잖아. 직장 다니면서 엄마랑 막내 동생까지 돌보다 보니까 여기저기 아프고 감당하기 힘들어.”
“팔십이 넘은 엄마는 더 힘드시지. 언니는 엄마에 비하면 아직 한참 젊잖아.”
힘들다고 호소하는 사람의 말을 웃으며 가볍게 여기는 동생에게 화가 났다. 전화를 끊고 진짜 공감 능력 없다고 씩씩대다가 과거의 내가 떠올랐다. 아, 맞다. 나도 그랬지. 상대에 대한 동생과 내 반응이 다를 게 없었던 거다. 그 후배에 대한 미안함이 뒤늦게 밀려왔다.
“넌 그 여자한테 월급 가불해 달라는 소리를 하면 절대 안 됐어.”
“왜?”
“사람은 자기랑 비슷한 처지의 사람한테만 공감을 느끼니까.”
tvn 드라마 <작은 아씨들> 1화 중에서
동병상련이라는 말처럼 보통 사람은 자신이 겪지 않은 일에는 공감하기 어렵다. 공감능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처지와 고통을 상상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재작년, 동생과의 대화 이후에 이렇게 결심했다. ‘다른 사람이 힘들다고 하면 무조건 정말 힘들겠다고 말해 주자.’
그렇다고 현재의 내가 공감능력 우수자라는 말은 아니다. 아직도 내 가치관과 기준으로 판단하는 버릇이 고쳐지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