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땐가 수업 시간에 소크라테스가 말했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처음 듣고는 단순히 기원전에 살았던 유명한 철학자가 저런 말을 했구나 하며 넘겼다. 단 한 번도 숨겨진 의미를 생각해 보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많이 들리는 화두 중에 하나가 ‘나를 알고 나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 한다’이다. 기원전 470년경에 태어난 인물이 했던 말에 현대인들이 이제야 법석을 떨며 반응하고 있다.
나 자신을 안다는 건 무슨 뜻일까. 나의 무지를 알라는 건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는 건가? 아니면 더 깊은 뜻이 숨겨져 있는 걸까?
지금까지 정신없이 달려온 삶이었다. 뭐가 그렇게 바빴던 건지(사실 생각해 보면 매 순간 바쁘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말하는 인생의 단계를 그대로 따라야 되는 줄로 알고 별다른 고민도 하지 않았다.
내가 행복해야 다른 사람도 행복할 수 있다는 말에 동의한다. 그런데 우리네 삶은 자신에게 주어진 많은 역할들을 감당해야 하고 그렇게 살다 보면 나보다 가족이나 타인을 먼저 배려하고 챙기게 된다. 거기서 오는 보람도 있지만 때때로 마음 한 구석에 왠지 모를 허전함이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쌓인다.
이제는 나도 나 자신을 삶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살고 싶다. 하지만 현실의 상황은 그런 삶을 살기 힘든 환경이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우선시해야 하는 일이 돌봄이기 때문이다.
2020년부터 나는 엄마와 동생에게 필요한 각종 먹을거리와 생필품을 구입하는 총괄 책임자로 승진했다. 이게 별 거 아닌 일인 것 같지만 은근 신경이 많이 쓰이는 데다가 평생 계속해야 한다. 세상은 넓고 사람이 살면서 필요한 물품은 너무나 많다. 조금 많이 과장하자면 백만 스물두 개다. 게다가 우리가 살면서 수행해야 할 역할이 한 가지만은 아니지 않은가.
며칠 전에 엄마와 동생이 쓰는 바디 로션이 다 떨어져서 주문한 뒤에 엄마에게 말했다. “방금 전 바디 로션 인터넷으로 주문했어요. 내일 아침에 배송 온대요.” 내 말이 끝나자 귀에 들리는 엄마의 대답. “핸드 로션도 다 떨어져 가는데.” 오늘은 ‘고구마가 없다’는 엄마. 동생이 먹을 두유도 주문해야 하는데. 아아, 우리 집이 마트였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1994년에 개봉한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는 미국 아이오아주의 엔도라라는 작은 마을에서 가장으로 힘들게 살아가는 길버트라는 청년의 이야기이다. 큰형은 집을 나갔고 길버트 혼자서 아버지의 자살로 초고도 비만이 되어 집에서만 지내는 엄마와 집에서 살림을 하는 누나, 사춘기의 여동생, 그리고 지적 장애인 남동생 어니를 돌보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와 함께 캠핑카를 타고 여행 다니다가 차가 고장 나서 잠깐 엔도라에 머물게 된 베키를 알게 되고 점점 친해진다. 바라는 게 뭐냐고 묻는 베키에게 길버트는 이렇게 대답한다.
“모든 걸 바꾸고 싶어. 우리 가족이 살 새집이 있었으면 좋겠고 우리 엄마가 에어로빅 수업을 들었으면 좋겠고 엘런도 어서 컸으면 좋겠고 아니가 멀쩡해졌으면 좋겠고 또…”
길버트가 바라는 건 모두 가족에 대한 내용이었다. 내가 이런 질문을 받았다면 뭐라고 대답했을까. 나도 길버트처럼 말했을 것 같다. 엄마가 건강하게 오래 사셨으면 좋겠고 막내가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고 가족 모두 건강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고…….
길버트의 말을 들은 베키는 자신을 위해 바라는 건 없냐고 물어본다. 그러자 길버트는 이렇게 대답한다.
“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좋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 걸까. 어떻게 살아야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언니가 아닌 그냥 나로 살고 싶다고 대답한다면 이기적인 사람인 걸까.
*9월 21일에 올린 같은 제목의 글의 내용을 일부 수정해서 다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