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 이별, 그리고 멀어질 자유
전 남자친구와 연애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제목을 잘못 읽으면 안 된다. 전남친이 나 아닌 다른 사람과 연애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여자를 많이 좋아했으면 좋겠다. 내 생각도 하지 말고, 새로운 그녀에게 내 얘기도 절대 안 하면 좋겠다.
스쳐간 전남친의 수만큼 전남친이 연애했으면 하는 마음의 결도 여러 가지다.
지금껏 내 인생의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전남친도 연애했으면 좋겠다. 그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만약 카카오톡에 새로운 여자친구 사진이 올라온다면 힘들겠지만, 그녀의 사진을 꽤 자주 들여다볼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아니라면 그가 다른 사람과 행복했으면 좋겠다. 내게도 충분한 시간과 기회가 있었고 부족했던 내 모습에 대해 아쉬움과 미안함도 있지만 할 만큼 했다. 많이 좋아하고 사랑하고 그리워했고 이젠 새 사람한테 보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뭐 내가 관여할 부분은 아니지만.
본론은 지금부터다. 보통의 전남친들이 연애하면 좋겠다. 간절히 그렇다. 연애를 해서 나에 대한 일말의 관심도 끊었으면 한다. 전남친의 새 여자친구가 간섭과 통제, 집착이 심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다른 여자 근처에도 못 가게 했으면 좋겠다. 그의 SNS도 관리해서 전여친이나 여자와 관련된 모든 연락수단을 차단하게 하면 좋겠다. 철저하게 내 위주의 생각이다.
전남친들도 똑같이 숨 막힘을 경험하면 좋겠다. 숨 막히게 사랑받으며 나 따윈 조금도 생각날 틈 없게, 일상이 빈틈없이 일과 사랑으로 꽉 채워지면 좋겠다. 새로운 그녀와 사랑에 빠져 그녀의 로망 속 결혼식을 올리고 백년해로했으면 좋겠다. 혹시나 새여친과 헤어진다면, 전남친의 직전여친이 헤어지고 나서도 만나달라고 집착을 부리면 좋겠다. 그의 매력에 빠져 그처럼 훈훈하고 편안한 사람은 없다며 다시 만나달라고, 기회를 달라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연락하면 좋겠다. 그리고 그가 가는 장소에 등장하며 그의 곁을 계속 맴돌면 좋겠다. 때로는 그의 곁을 맴도는 전여친에게 관심보이는 다른 남자를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면 좋겠다.
어쩌면 내 바람이 쓸모없게 난 너무 빨리, 너무 쉽게 지워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전남친들이 헤어지고 나서 너무 쉽고 아무렇지 않게 내 주위에 등장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너무나도 편안하고 안전하게 느껴지나 보다. 사람들이 쉽게 들어오기 어려워하는 철벽을 뚫고 들어온 그들은 내가 너무 편안해서 헤어지고 나서도 친구처럼, 친구보다 더 편한 전여친처럼, 전여친이 아니라 마치 새로 알아가고 싶은 여자처럼 경계를 밟고 서성이나 보다.
헤어진 연인과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썼다. 내 입으로 나는 쿨하다고도 했고, 쿨하다는 이야기도 들어봤다. 상대방의 감정과 자유에 대한 작은 배려이다. 내 마음 조금 다친 것, 아픈 것 따윈 툭툭 털어낼 수 있고, 나에게 더 이상 이성친구로서의 특별한 호의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적당한 거리의 지인조차 못될 것도 없다. 그리고 그의 바운더리를 내가 독점하거나 침범할 생각도 없다. 헤어지며 나는 괜찮다고 나와 사귀기 전처럼 그도 그의 바운더리를 그대로 유지해도 된다고 이야기했다.
그래도 정작 마음이 아주 편치는 않다. 헤어진 연인이 내 브런치 글에 댓글을 남긴다거나, 모임에서 내 옆자리에 앉는 것과 같은 일은 심장을 빨리 뛰게 한다. 마치 만날 때처럼 숨 막히고 옥죄어져 오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의도가 무엇일까 생각한다. 나를 심리적으로 압박하려 드는 것인가 생각한다. 아니면 친한 오빠의 말처럼 그냥 그래도 내가 제일 예뻐서 아무 생각 없이 내 옆에 앉는 것일까 생각한다. 물론 내 직감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내 교감신경이 반응하고 불안한 마음이 들 때 몸이 말해준다. 이 상황이 편안하지 않다. 그들이 선을 넘었다.
내가 그렇게 만만한가?
타인의 감정에 배려심이 많은 섬세한 내가, 그런데 압박감에 약하고 불안감과 우울감에 정신과 약을 매일 꼬박꼬박 먹고 자는 내가, 쿨병 걸린 전여친, 아니 쿨병 걸린 전남친의 깨끗하게 지워진 어느 새로운 여자가 되어버린다. 전남친이 우리가 만난 그곳에서 또 다른 여자친구를 사귀기를, 그들이 서로를 옥죄며 죽일 듯이 살릴 듯이 사랑하기를, 그래서 나를 영원히 지워주기를, 그리고 나에게서 자연스레 멀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나 역시 이별을 말하고 쿨병 걸린 전여친의 탈을 쓴 세상 쿨하지 못한 여자가 되어 그의 곁을 서성인 적이 있다. 20대 때 그랬다. 확 끌렸던 상대와 fwb(friends with benefits)는 될 수 있어도 플라토닉한(platonic) 친구는 될 수 없다. 그 친구라는 기한은 너무 유한하다. 애초에 연인이 되지 않았던, 열정적이고 성급한 내가 연인으로 만들지 만들지 않았던, 그런 친구와는 절대 연인이 되면 안 된다. 그리고 연인이 되었다가 무라벨(lable free)이 된 매력적인 누군가와는 다시 친구가 될 수 없다. 늘 호감이 어느 곳에 자리할 것이고, 서로의 행동에 헷갈리다가, 언젠가는 헷갈리는 것도 지쳐 멀어지기를 택할 것이다. 인성에 신뢰를 못 느껴 헤어진 누군가와도 친구가 될 수 없다.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은 친구가 아니다. 그리고 신뢰하지 못하는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오면 마음이 불안해진다.
헤어진 연인과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말은 케미스트리(chemistry)가 터지지 않았던, 손을 잡았는데 심장이 빨리 뛰지 않았던, 하지만 의도를 분명히 신뢰할 수 있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내 모든 신경세포가 확인해 주는 사람과만 제한적인 경우에서 성립하는 말이다. 너무 많이 알면 사랑하거나, 멀어질 수밖에 없다. 멀어져야 할 때에 멀어지지 않는 것은 감정적으로 미성숙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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