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좋았다. 100% 신뢰했다. 그가 남자친구 있는데 그에게 수작 걸었던 여자에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고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바람피울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굳건했던 신뢰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순간은 보통 나에게 투명하다고 생각했던 그가 어느 부분에서 투명하지 않았음을 발견할 때이다.
지난주부터 전여친들에 대한 판도라상자를 열고 있었다. 외국인 만나면 전여친 이야기는 하나의 패키지 상품처럼 따라오는 것인가 싶었다. 내가 데이트해 본 서양남자나 유학생들은 전연인 얘기를 어찌나 편하게 하는지 궁금하지도 않은 과도한 디테일까지 구구절절 들어야 했다.
물어보면 술술 나오니까 알아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파기 시작했다. 그리고 패턴을 발견했다. 전여자친구들이 헤어지고 나서 붙잡고, 어쩌면 나중에도 종종 생각하는 그런 유형의 남자라는 것. 딱 그런 유형의 남자와 오래 만났고, 못 잊다가 결국 재회까지 해본 나는 바로 어떤 느낌인지 알았다.
오래 만난 전남친과 그는 MBTI도 같다. 내가 사랑했고 싫어했던 MBTI, ESFJ.
여자가 헤어지고 나서도 마치 백업처럼 늘 가슴 한편에 품고 다니는, 상대방은 이제 안중에도 없는데 혼자만 여전히 재회가능성을 열어놓은 영원한 결혼후보 같은 남자.
여자가 못 잊는 남자는 보기만 해도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제일 잘생긴 남자도, 제일 돈 잘 버는 능력남도 아니다. 자기한테 제일 잘해줬던 남자, 제일 착한 남자, 제일 공주처럼 대접해 줬던 남자, 고마움과 미안함이 남는 남자, 그래서 미련이 남는 남자이다. 더 잘생기고 능력 있는 남자 만나봐도 절대 못 잊는 남자는 제일 나와 우리 연애에 진심이었던 사랑에 순수했던 남자이다.
현남친이 중요했던(?) 엑스를 지칭하는 제대로 불쾌한 표현을 빌자면 나의 메이저 전남친이 그랬고, 현남친이 그렇다. 진심이고 순수하고 잘해 준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 특별하고 사랑받는다고 느끼게 해준다. 우리가 모든 면에서 가장 잘 맞고 나를 가장 특별하게 느끼는 것은 사실이라고 믿지만, 당연히 전여친들에게도 그는 사랑꾼이었을 것이다.
나도 늘 사랑꾼이었고, 그도 늘 그랬을 것이다. ESFJ와 정반대 MBTI, INTP인 나는 내 사람만 끔찍하게 챙긴다. 더구나 금이 많은 사주여서 맺고 끝는 것은 칼 같다. 새로운 연애에 진심이라면 전남친은 사실상 남이다. 그땐 사랑했지만, 다시 만날 생각이 없다면 상처 줘야만 한다면 상처 준다. 바운더리 안과 밖의 온도차는 당사자뿐 아니라 모두가 느낄 수 있게 극명하다.
내가 아는 ESFJ는 다 퍼주는 성격이다. 이들은 관계가 제일 중요하다. ESFJ가 내게 천사처럼 잘해준다면, 언젠가 그들의 사랑은 나눠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메이저 전남친과도 결국 그 문제로 헤어졌다. 반대가 끌리는 것인지, 어떤 면에서는 꽤 냉정하고 차갑고 현실적인 내가 결국 따뜻한 사람을 필요로 하는지 ESFJ는 싫다면서 또 다른 엣프제를 만나고 사랑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엔 처음부터 생각했다. 이 사람과 결혼하게 되면 모든 것은 그의 가족이나 친한 친구들과 나눌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고. 사랑은 전부를 받아들여야 지속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배웠다. 세상에 나한테만 천사인 사람은 없다.
그래도 다른 여자나 전여친과는 내 남자친구를 절대 나눠가질 수 없다. 선은 가족과 절친 거기까지다. 전여자친구가 친구인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끌렸던 관계에서 완전한 친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스타그램 친구 그 정도까지다. 그것도 가볍게 아주 짧게 만난 전연인 정도에 한해서.
전여친 중 한 명과 연애기간을 물어보고 있었는데, 그 전여친이 최근에 본인에게 연락을 했다고 이야기했다. 너무 아무렇지 않게 내게 재밌고 황당한 얘기 들려주듯이 전여친이 현재 남자친구에 대한 상담을 본인에게 했다고 말해준다. 그리고 나를 처음 만나게 전에 서울에서 만났다는 친구가 전여친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신뢰가 굳건해서 당장 그 상황에서는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난 너 믿어(I trust you).”하고 넘어갔다.
전여친이 친구라길래, 자주 연락 안 하는 가벼운 지인이냐는 의미로 장난 반으로 “인스타그램 친구야?(instagram friends?)”라고 물어봤다.
그때는 아니라고 했던 것 같은데, 집에 와서 자기가 오해했던 것 같다고 나중에 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 정정하겠다며 인스타그램 친구 맞다고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일단은 더 생각 안 하고 잤다(그날밤 왠지 모르게 악몽을 꿨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이 얘기를 꺼냈다. 전여친이랑 이야기하는 것이 신경 쓰이고 배신감 느낀다고 말했다. 그리고 인스타그램 친구 끊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몇 주전에 나를 만나기 전 만났을 때도 그 여자가 먼저 만나자고 하길래 남자친구 있으니까 안 만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는데도 보자고 해서 봤다고 했다. 그리고 연락 안 하고 있다가 최근에 또 연락이 와서 본인 연애상담을 요청하길래 들어줬다고 했다. 여자친구 생겼다고 이야기했는데 축하한다더니 계속 본인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듣고 난 crazy b**ch(미친 ㅆ년)이라고 했다. 현재 남자친구 얘기를 몇 년 전에 만났던 남자친구에게 하는 심리를 너무 잘 안다. 전남친을 의식하든 아니든 백업으로 생각하지 않고서는 하지 않는 행동이다.
나는 모든 신뢰를 다 주고 올인하고 있었는데 전여친과 대화를 했다는 것에 상처받았다. 완전한 신뢰에 금이 갔다. 그가 나를 사랑하고 우리 관계에 진심이라는 것은 여전히 신뢰하지만, 내가 주고 싶었던 만큼의 신뢰와 그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내 마음의 닻이 약해졌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 생각해 보니까 우리가 전여친들이나 여사친에 대한 대화를 충분히 했는데도 그 사람의 존재를 먼저 나한테 말하지 않은 것이 더 힘들었다.
내 마음과 신뢰에 대한 이야기를 충분히 했다. 그는 모든 것에 완전히 책임지고 사과했다. 조금의 핑계도 대지 않았고, 조금도 주제를 논점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았다. 내가 전여친과 친구로 지내고 가끔 연락하는 것을 문제 삼는 게 문화차이냐고 물었는데 아니라고 했다. 진지하게 누군가를 만나면 다 끊어내는 것이 맞다고 했다.
자기가 미리 피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상처 줘서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했다. 그리고 모든 전여친들을 모든 SNS에서 다 끊고 차단했다고 했다.
상처 준 것에 대해 너무 힘들어하길래, 하루동안만 사실 관계를 물었고, 이후에 다시 이 이야기를 안 꺼내겠다고 했다. 나는 원래 누가 나한테 상처를 크게 주면 정곡을 찔러서 그의 피를 말려버리는 사람이었다. 내가 고르고 골라 신뢰를 다 준 그 사람에게 배신감을 느끼면 어딘가 숨어있던 냉혈한의 자아가 나와 내 눈에 눈물 나게 하면 네 눈엔 피눈물 나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스스로가 싫다고 했다. 이 말을 들으니 겁났다. 똑같은 실수를 또 할 수는 없었다. 사랑하면 두려워도 그를 계속 믿어야 하고, 세상 누구보다 감싸안아줘야한다. 그것이 사랑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람을 믿는 것은 처음이 가장 쉽다. 믿어야 할 이유가 있어서 믿었다고 생각했는데, 믿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어서 믿기 쉬웠나 보다. 불안해할 만한 이유가 생겼는데도 믿는다는 것은 몇 배로 어렵다.
그런데 믿지 못하면 모든 것들이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빠져나간다. 단단했다고 믿었던 관계가 내 믿음이 약해지는 순간 모래로 쌓은 성으로 전락한다. 내가 먼저 말하지 않았는데, 그는 믿을만한 이유를 앞으로 주겠다고 한다. 신뢰를 쌓아나가도록 노력하겠다고 한다.
그는 나에게 얼마나 진심이고 우리 관계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이야기하며 확신을 심어주려 노력했다. 언어로 여러 번 들려주는 것이 도움은 됐다.
나는 원래 사람을 믿는데 문제(trust issues)가 있었다. 굳이 믿어야 한다면 가변적인 사랑을 믿는 것보다는 사람을 믿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믿을만한 사람을 골라 사랑을 주자고 결심했다. 그도 그렇게 고른 사람이다. 당장 그에게 100%의 신뢰를 주기가 힘들다면, 더 믿기 쉬운 나 자신을 믿어보는 것은 어떨까? 지금까지 살아오며 쌓은 모든 지혜를 총 동원해서 그를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판단한 나 자신을 믿으면 조금 더 쉽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