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말고 썰매 말고 썸탈래요
웰컴 온 보드. 썸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연말 계획은 쉬기, 쉬기, 그리고, 썸타기다. 1월부터 11월까지 아침부터 잠들기 전까지 소처럼 일하느라 몸도 마음도 지쳤다. 그런데 일보다 나를 더 지치게 한 것은 확실히 연애다. 일은 성과가 좋으면 자존감을 올려준다. 그런데 실패한 연애는 내 안목을 의심하게 만든다. ‘어머, 아무것도 아닌 나를 누군가가 이렇게 대단하게 생각하나 봐. ’ 하고 잠시 올라갔던 자존감은 ‘그럼 그렇지. 나한테 완벽하게 멀쩡한 사람이 다가올 리가 없지. ’하며 이내 내리꽂는다.
반복된 연애 실패는 자존감만 내리꽂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소처럼 일해서 쌓은 계좌 잔고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내가 너무너무 만나고 싶어서 사귄 사람한테 쓴 돈은 당연히 안 아깝다. 그 하루하루가 소중했다. 지나고 나서도 한때나마 내게 설레는 감정 느끼게 해 줘서 나를 미치게 했던 그 사람에게 진심으로 고맙다.
그런데 마음 그 정도 아닌 사람한테 쓴 시간과 돈은 지나고 나면 아깝다. 더 아까운 것은 체력소모와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에 앓느라 허비한 시간이다. 그리고 제일 속상한 것은 당연히 손상입은 내 건강이다. 시간이야 돌아오지는 않지만, 내게 계속해서 다가오는 시간을 좀 더 아껴보자 마음먹으면 된다. 하루하루 피로에 찌들어가며 번 돈도 조금 더 정신 차리고 열심히 굴려보자고 다짐하면 된다.
그런데, 내 피부, 편도, 위, 간에 가해진 손상을 복구하는 데는 훨씬 오래 걸린다. 9월부터 아팠다. 몸도 마음도 상태가 안 좋았다. 3명의 절대, 절대, 평생 혼자 사는 한이 있어도 절대 돌아가고 싶지 사람들과의 연애 릴레이가 끝난 후 몇 년 만에 제일 아팠다. 그렇게 아프고 나니까 건강이 제일 중요하구나 싶었다. 내 몸을 끔찍하게 아껴야겠구나, 나 대신 나를 먹여 살려 줄 사람도 없는데, 내 한 몸은 어떻게 해서라도 잘 관리해야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이제 달라지기로 했다. 사귀기 전부터 올인 안 하기로 했다. 연애 말고 여~러명과 썸을 오~래 타기로 했다. 앞으로 누구든 3개월 이상 지켜보고 인성 검증되면 사귀기로 결심했다. 성격 급하면, 그것부터가 레드 플래그다. 성격 불같고 급한 사람은 이미 나랑 안 맞으니, 급하게 고백하거나 사귀고 싶어 하는 사람 있으면 그대로 거기서 정리하면 될 것 같다.
내가 연애를 자주 하고 빨리 끝낸다고 해서 성격이 급하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다. 신중하지 않은 것은 맞는데, 확인을 해보기 위해 일단 저질러보는 것이다. 만나봐야 진짜 인성이 파악이 되니까 긴가민가 하는 사람을 오히려 빨리 사귀어 보았던 것 같다. 언제든 아니면 끝낼 마음은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다.
나는 농작물을 추수할 즈음의 가을에 태어난 세상 느긋한 사람이다. 계절적으로 먹을 것이 풍성해서 음식이 있다고 그때그때 먹지 않아도 되고 제일 맛있어 보이는 것으로 골라 먹을 수 있는 시기에 태어났다. 연애도 내가 마음이 가야 시작하고 유지하지, 누군가가 나한테 불도저처럼 다가온다고 그에게 특별히 더 매력을 느끼지는 않는다.
남자에게 밥도 내가 먼저 먹자고 하는 편이 좋다. 천천히 오래 지켜본 후에 마음의 준비가 됐을 때 내 입으로, 혹은 내 손가락 타이핑으로 둘이 밥 먹자고 얘기를 꺼내는 편이 좋다. 내가 먼저 말하고 싶은 정도의 마음이 되었는데, 그가 약속을 잡아야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나가고 싶어 진다. 상대방이 먼저 섣불리 둘이 만나자고 하면 보통 핑계를 대거나 쓱— 멀어지기를 택한다.
모임에서 6개월 넘게 자연스럽게 지켜본 사람이 있었는데, 최근에 조금 더 가까워져서 둘이 대화도 할 겸 (사전에 혼자 계획을 해서) 차를 얻어 탔다. 그런데 세 번 정도 만난 분이 자기도 같이 태워달라는 것이다. ‘아니, 이렇게 눈치가 없을 수가. ’ 그런데 더 황당했던 것은 그분 집이 카페에서 걸어서 한 5~10분 거리여서 전혀 차를 얻어 탈 이유가 없었다는 것다. 그리고, 나는 친분이 어느 정도 형성이 되어서 차를 태워달라고 한 것인데 그분은 그냥 갑작스러웠다.
내가 관심 있는 남자의 차 안에서 제3의 남자가 나에게 언제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하는 것이다. 착각과 혼자만의 썸 생성 전문가인 나는 이쯤 되니 그 제3의 남자가 나를 졸졸 따라 차를 같이 태워달라고 했나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일하는 곳이 엄청 가깝다는 것을 알게 돼서 그냥 쓱 던진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픈카카오톡의 개인톡으로 12월에 밥을 먹자고 보내왔다.
집에 돌아가서 작은 스트레스가 시작되었다. 성격이 안 맞을 것이 확실하고, 나와 결도 달라 보이는 사람과의 잠재적 밥 약속이 스트레스를 불러일으킨다. 의미 없는 점심을 꼭 함께 해야 하나. 단체로 고기 먹는 것은 언제든 환영이지만, 둘이 만나고 싶지는 않은데 ㅠㅠㅠ 나는 과도하게 솔직하고 마음에 있는 말 다 해야 하는 사람이라서, 마음에 있는 말 못 할 것 같은 나와 컬러 다른 사람과는 1대 1로 시간 보내고 싶지 않은데 ㅠㅠ
재미 삼아 내 팬클럽이라고 부르는, 내가 리드하는 투자 스터디 모임에는 영입했다. 정해진 시간에,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단체로 보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단 둘이 밥은 모르겠다. 요즘 관심이 생긴 그분에게도 아직 둘이 밥 먹자고 할 정도의 감정까지는 아니다. 차 안에서 오며 가며 대화를 나누는 정도의 관계까지이다. 난 이렇게 느리고 느긋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 정도의 관계가 되기까지 내 최애 인간군 INFP에 속하는 그도 아주 천천히, 그리고 부담스럽지 않게 관심과 호의를 보여줘 왔다. 그가 나를 좋아한다고 확신할 수 없을 정도의, 그래서 편안한 딱 그 정도의 호의이다. 그런데 불쑥, 하필 그의 차 안에서 제3의 남자가 딱 3번 단체로 봤는데 단 둘이 밥약속을 잡는다고? 이건 선 넘었다 ㅋㅋㅋ
난 이 정도로 느리고 느긋하다. 그동안 연애를 빨리 시작했던 것은 그만큼 정서적으로 빠르게 친밀해져서 그랬던 것이다. 나는 질문을 잘한다. AI 시기에 살아남을 수 있는 나의 강점이다. 2번 정도 만나 10시간 정도 대화하면서 적절한 질문들을 적재적시(right timing)에 던졌더니 서로에 대해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는 거의 모든 중요한 것들을 알게 되었다. 나머지는 시간을 들여 행동을 관찰하고, 살과 살을 맞닿아보며 케미스트리가 터지는지 확인을 해봐야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진전이 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서양식 연애에도 마음을 열어놓았다. 더 이상의 빠른 만남과 이별은 도무지 안될 것 같다. 스트레스를 온몸으로 맞아 몸이 너무 아프다. 모든 면에서 충분히 알아가고 난 다음에 진지한 연애를 시작하는 것에 마음을 열어 놓아야 할 것 같다.
30대 개미투자자가 연말에 기대하는 것은 산타랠리뿐이다. 연애를 쉬려다가, 쉬어봤자 영원히 잊지 못할 전남친 생각만 자꾸 나고, 커플지옥 크리스마스 때만큼은 솔로이고 싶지 않은 대한민국 거주 세계인이 연애시장에 나오는 연애 대목에 방구석에서 혼자 배달음식 먹으며 살만 찔 수는 없다. 이때 썸을 못 타면 썸을 탈 자격이 없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게 순리대로 사는 길이니, 연말엔 산타랠리로 돈은 못 불려도 썸타랠리엔 참여해야 한다.
산타랠리엔 여러 종목이 군집을 이루어 다 함께 상승한다. 썸타랠리 기간에도 여러 썸들이 군집을 이루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연애 세포들을 줄지어 흥분시킨다. 주식도 분산 투자를 해서 변동성을 줄이듯이 썸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한 썸에만 몰빵 했다가 인성에 문제 있는 사람과 엮여서 역류성 식도염으로 속이 타들어가는 데다가, 스트레스성 폭식으로 살이 5킬로 찌거나, 사귀고 나니 돈 없다는 남자와 엮여서 계좌가 탈탈 털리고, 콜록콜록거리면서 극구 사양할 수 없을 것 같은 사유를 만들어 만나자고 하더니 스킨십 세례를 퍼붓는 탓에 독하다는 올해 감기를 옮아서 4일간 방구석에서 불쌍하게 혼자 누워있게 된다.
썸을 여러 개 타면 이 모든 몰빵의 부작용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한 명이 싸할 때, 다른 사람이 다르게 행동하는 것을 보면 자연스럽게 ‘그래. 이게 정상이지. ’하며 이상한 사람을 스윽- 흘려보낼 수 있다. 쓸데없이 검증되지 않은 누군가에게 마음을 다 쏟아 금사빠하는 세상 위험천만한 일도 방지할 수 있다.
연애에서 외로움과 간절함은 적이다. 외롭지 않고, 간절하지도 않게, 썸이 잘 안 되면 매우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보장하는 해일리 팬클럽 스터디원들을 불러 모아 투썸 조각케이크이나 편의점 케이크를 먹겠다는 소박한 계획으로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스윽 지나 보겠다는 마음이다.
훈잘남과의 데이트 약속이 생기지 않으면 주로 나 혼자 떠드는 단톡방에 “윤택한 싱글라이프를 위해 데이트 없으면 같이 공부나 해요. ”라는 마법의 문장을 외쳐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