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하면 싫어진다
연애 말고 썰매 말고 썸탄다더니 썰매장에 가게 생겼다. 그리고 연애도 하고 싶어졌다. 재밌게 썸탈 사람도 없고 썸타고 싶을 만한 사람이면, 내가 더 간절해져서 연애가 하고 싶어 진다. 그럴 때일수록 마음 단단히 먹고 간절해지면 안 된다. 여자도 간절하면 별로여 보인다.
스노우파크 티켓을 싸게 살 수 있어서 누구라도 같이 갈 수 있겠지 하며 2장을 호기롭게 구입했다. 이번 주 목요일까지 써야 하는 티켓이다. 마침 표를 산 주에 연락을 자주 하고 있던 지인이 있어서 같이 가자고 했다.
”무조건 가지~“ 라며 같이 간다고 했다. 관심 있는 여자가 썰매장에 같이 가자고 하니깐 신났는지 그의 급발진이 시작되었다. 예쁘다, 귀엽다는 말과 샤랑한다라고 써있는 등의 선넘는 이모티콘들이 쏟아지니깐 발뺌하고 싶어졌다. 편안하고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지인에서 저 세상 부담보이 그 자체로 변했다. 스노우파크 가서 하루종일 놀다 왔다간 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것 같았다. 연애 별로 못해본 서툰 남자 같은데 분위기 좋게 잘 놀고 와서 차갑게 변하면 그에게 마상(마음의 상처)을 너무 크게 줄 것 같았다.
그날 일이 있다고 하면 다른 날도 된다고 얘기할까 봐서 같아서 다짜고짜 그냥 미안한데 못 갈 것 같다고 했다.
표가 붕 떴으니, 지인 중에 가장 편한 사람인 거의 매일 연락하고 지내는 친한 오빠한테 같이 가자고 했다. 근데 쉬고 싶다고 같이 안 간다고 한다. 두 번 정도 물어봤는데 안 간다길래 어쩔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는 잘됐다. 한참 오빠라 잘될 가능성이 없는 여자 앞에서 보여주는 그의 나잇값 하는 텐션으로 옆에 있는 나까지 텐션이 쭉 떨어졌을 것이다.
여자 지인에게 같이 가자고 하는 옵션과 블라인드에 올리는 옵션이 남았다. 표를 살 때부터 정 없으면 블라인드에 올리지 뭐라고 생각했다. 연초에 지인한테는 털어놓고 싶지 않은 무거운 고민 얘기를 하고 싶어서 블라인드에서 동네 친구를 구해본 적이 있었다. 그때 좋은 오빠를 만났다. 물론 그 오빠가 나에게 반했고, 썸 타다가 짧게 사귀다가 결국 연락처를 지웠다. 좋은 오빠였어서 블라인드여도 쪽지로 말 걸 때 말투를 잘 감별해서 고르면 이상한 사람 만나지 않을 수 있겠다란 생각이 생겼다.
썰매를 빌미로 불특정 누군가와 연애를 염두에 둔 썸을 탈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여자 지인보다는 남자 지인이 편할 것 같았다. 심심하면 주로 남사친에게 연락한다. 남자를 대하는 것이 편하다. 별생각 없이 놀러 가는 건데 여자 지인과 가면 착한 동생이면 나한테 사회생활한다고 동생이 불편할 것 같고, 평범한 친구나 언니와 간다면 배려심 많은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맞춰주느라 지쳐서 돌아올 것이다. 그래서 남자가 편하다. 타인을 잘 챙기는 것은 나의 디폴트인데 그래도 남자면 조금은 그의 실시간 상태와 일부러 감정을 무시하며 편안하게 행동할 수 있다. 너무 섬세한 여자라 그런지, 여자와 함께 있을 땐 마치 공주님하고 데이트하는 남자친구가 된 것처럼 뭔가 지친다.
그래서 블라인드에 올렸다. 그리 중요한 정보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인들이 블라에 놀 사람 모집할 때 주로 쓰는 인포메이션을 포함시켰다. 키, 나이, 성격, 원하는 사람 조건을 올렸다. 하루 같이 놀 사람 구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진지 노잼 스타일은 만나고 싶지 않았다. 왜냐면 재미가 없으니까. 말이 많은데 진지하기까지 하면 최악이다. 휴가 내고 놀러 가는데 피곤함이 극대화될 것이다. 그래서 평일에 하루 놀러 갈 수 있는 훈흔(훈훈 ~ 흔한 남자), 착하고 재밌고, 같은 회사 사람 아닌 사람을 조건으로 걸었다. 나도 최소한 하루 보기엔 착하고 재밌는 사람이라, 훈흔, 착하고 재밌음이라고 올렸다. 착한 건 모르겠지만 하루 놀기에도 재밌고 오래 보면 점점 더 재밌는 사람이라 자부한다.
남자 지인에게 신청하면 오해할 것 같고, 부담스러운 사이가 될 것 같고, 여자 지인하고 가는 것보단 데이트 아닌 데이트 느낌이 나면 좋을 것 같다며 블라인드에 올려본다고 적었다. 오후 2시에 올렸으면 더 연락이 왔겠지만 새벽 2시에 올려서 다음 날이 되니 순식간에 글이 묻혔다. 그래도 다행히 올리자마자 대여섯 개의 댓글과 쪽지가 도착했다. 처음에 나이는 안 올렸는데, 남자들이 키와 나이를 보내길래 나도 글을 수정해 나이를 포함시켰다.
어떤 사람은 셀소(셀프소개팅)에 답 쪽지 보내듯이 간추린 양식 자기소개서를 보냈다. 내게는 불필요한 정보들이 담겨있어 평소 여러 여자에게 복붙에서 보내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이 / 거주지 / 스타일/ 키/ 체형(근육많은 보통체형 ㅋㅋ) / MBTI / 놀러 가는 다짐 / 가능한 날짜”로 압축적이게 유용한 정보들을 보내왔다. 글로벌 대기업에 다니는 일잘러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난 셀소를 올린 것이 아니었어서 이분께 답을 하지 않았다. MBTI를 하나만 써서 보냈다면 답을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전혀 다른 두 개의 MBTI를 두 개 다 써서 보냈길래 ‘자아가 2개라는 건가? 이해가 되지 않군. ’하며 답을 하지 않았다.
요점 파악을 잘 못하는 한 분도 쪽지를 보내왔다. 분명 썰매장을 가는 초대인데 스노우보드타는 사진을 보내며 스노우보드를 좋아한다고 한다. 말도 장황하다. 연락이 많이 올 것 같은데, 제게 기회가 있다면 연락을 달라고 한다. 재밌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말투가 꽤나 따뜻하고 겸손하다. ^^가 가득 들어있어, 올드한 느낌은 들지만 나이 차이 나는 착한 오빠도 하루 놀기에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달랑 ”사진 교환하시죠“ 라는 쪽지도 있다. 얼굴에 자신이 있어서 사진 교환은 두려워하지 않지만, 셀소하는 것도 아닌데 다짜고짜 사진 교환 요청하는 성격 급한 극한효율추구형 인간은 만나고 싶지 않아서 답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담백하고 심플한 쪽지도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랑 가실래요? OO살고 OO살 남자입니다 “ 아주 심플해서 마음에 들었다. 제일 정상적인 사람일 것 같다. 이 사람을 1순위로 올려놓았다. 늦었으니까 낼 날짜나 이런 걸 더 얘기하자고 하고 간단히 대화를 마무리지었다. ”넹 좋은 꿈 꾸셔요. “라고 답이 온다. 오! 말을 예쁘게 하는 것으로 보아 마음도 따뜻해 보인다.
담백심플남과 함께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어서 다음 날 날짜가 언제 가능한지 물어봤다. 답이 늦길래 그 사이에 ^^ 아재에게도 쪽지를 보낸다. 이제야 요점 파악이 되셨는지, “아 스노우보드가 아니군여. ”하며 셀프 정정하신다. 나도 공공기관 다니지만, 역시 대기업남과 공공기관남은 차이가 크다. 요점 파악과 효과적인 의사소통 능력에서 대기업남이 압승이다. 하지만, 차가운 복붙보다는 조금 과해 보이긴 해도 인간미 있어 보이는 공공기관남을 선택했다. 이 분은 답도 바로 오고 아주 열성적이다. 담백심플남과 연락이 닿지 않는 사이 눈웃음 아저씨와 약속을 잡았다. 역시나 ^^에서 추정되는 아재미는 사실이었고 6살 정도 연상남이었다.
약속을 잡았는데, 뭔가 느낌이 쎄하다. 굳이 많이 알아보고, 알아본 정보를 공유하고, 문장도 길게 쓴다. 실제로 말이 많은 것보다 주고받는 형식의 SNS 플랫폼에서 말 많은 것은 더 싫다. 다음 주의 날씨부터 해서 어떤 복장을 입고 가야 하는지까지 친절하게 인터넷 정보 이곳저곳의 캡처 화면을 여러 개 보내신다. 슈퍼 J의 과도한 친절함과 계획성은 극P에겐 도리어 숨이 막힌다. 더구나 날씨 얘기 많이 하는 남자 중에 훈남은 별로 본 적이 없다. 현재의 날씨 얘기는 괜찮은데 일기예보처럼 미래의 날씨 얘기를 자주 하는 사람들에게 반해본 적은 없다.
나도 핸드폰이 있고 신문기사도 아침마다 읽어서 굳이 일기예보를 미리 해줄 필요가 없다. 일기예보남만 믿고 걸러도 모쏠 느낌의 연애가 간절한 서툰 남자는 피할 수 있다. 서른 n살 언니의 경험에서, 그리고 가슴에서 나온 얘기다. 상대방은 별로 필요가 없는데 본인이 베풀고 본인이 만족하는 그런 종류의 친절이다. 인간관계에서 좋은 휴먼이 되고 싶다면 이런 AI가 더 잘 베풀 수 있는 친절 말고, 상대의 상황을 봐가며 내 행동을 바꿀 수 있는 진짜 희생과 배려가 필요하다. 일기예보남들은 보통 진짜 희생과 배려 같은 것들이 잘 안 됐다.
갈매기 모양 눈웃음이 많은 일기예보남은 나비효과 얘기를 하며 내가 표 두 장을 샀을 뿐인데 본인이 같이 가게 되었다며 설레는 감정을 표현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반면, 난 스노우파크에 같이 가서 하루를 즐겁게 보낸 그가 크리스마스 즈음에 내 남자친구가 되어있기를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
키가 큰데 덩치도 크고 내 취향이 아닌 우락부락한 외모의 남자가 나오거나, 심플담백하고 대화 잘 통하는 남자지만 키가 작고 손도 내 손보다 작거나, 학교 다닐 때 캠퍼스에서 많이 본 안경 쓰고 엄마말 잘 들을 것 같은 남자가 등장하겠다는 것이 현실적인 기대다.
잘생기고 훈훈한 남자는 바쁘다. 그의 마음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먼저 얻어서 선택이 되어야 만날 수 있다. 스노우파크 티켓을 무료로 제공해 준다고 해서 이 여자 저 여자가 모두 만나고 싶어하는 인기많은 훈남이 블라인드의 랜덤한 여자와 보낼 수 있는 시간에 그리 적극적 일리가 없다. 그들은 언제든 여자와 쉽게 데이트할 수 있다. 훈훈한 여자가 남자에 질릴 만큼 훈훈남 남자도 여자에 질릴 대로 질릴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들도 여자를 거르고 걸러서 만난다.
그나마 최대치의 기대는 평범한 외모의 유머러스한 연애 경험 좀 있는 남자가 나와 함께 지난 연애 얘기 즐겁게 하며 같이 스케이트 타고, 츄러스 먹고, 2명이서 타야하는 루프 썰매를 같이 타는 것이다. 내가 글을 담백하고 가볍게 썼으니, 평일에 시간이 되는 근처 사는 남자가 가볍게 나오는 것이 나의 작은 바람이었다.
갈매기눈웃음^^ 아재는 과도한 설렘을 감추지 못하고 내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하다, 아침부터 느닷없이 좋은 하루 보내라, 심심하면 언제든 말 걸라며 선을 넘기 시작한다.
[혼자 썸타기 금지. 이 선 넘으면 침범이야 beep]
그래서 약속 취소했다. 약속 잡았으면 깔끔하게 그날 하루 만나 즐거운 시간 보내고 돌아가면 된다. 여자가 곤궁해 보이는 저런 간절한 태도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간절하면 싫어진다. 예전 같으면 잡은 약속은 지키려고 했을 텐데, 살면서 나 자신보다 타인에게 친절했더니 스스로에게 굉장히 안 좋았던 경험이 쌓이니 쎄한 느낌엔 주위를 기울이는 게 건강하고 지속가능하게 생존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이성과 관련된 문제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그래서 다시 심플담백남한테 연락했다. 그가 답을 느지막이 줘서 이미 약속 잡았다고 취소되면 알려주겠다고 했는데, 같이 갈 수 있냐고 다시 물었다. 그리고서 평범하게 친구처럼 대화를 몇 마디 주고받고 약속을 잡았다. 이름, 회사, 얼굴, 키, MBTI 다 모르지만 쎄하진 않다. 그걸로 됐다.
내일 구체적인 시간 약속을 잡을 생각인데, 혹시나 그가 전날 취소한다고 실망하지도 않을 것이다. 만약 당일에 바람맞는다면 혼자라도 가서 놀다 올 생각이다. 혼자 놀러 가는 것이 부담스러운 사람이나 쎄한 사람과 가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