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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라서 행복한 싱글 인 서울

밥 한 번 먹기 전에 신중하자

by 해센스

일요일에 혼자 싱글 인 서울을 봤다. 내 취향을 타인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아서 영화는 주로 혼자 본다. 타인과 어떤 영화를 봤는데 영화가 좋았으면 혼자 그 영화를 다시 보기도 한다. 영화는 혼자 봐야 몰입감이 극대화된다. 혼자 보면 영화를 보고 나서 타인이 무심코 내뱉는 영화평에 내 감동과 여운이 깨질 위험도 감수할 필요가 없어진다. 같이 보는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 취향의 영화를 내가 가장 편안한 자세로 내가 고른 간식을 독점하면서 나만의 감성에 빠져 감상할 수 있는 자유가 좋다.


싱글 인 서울이라는 영화도 내 취향의 딱 부합하는 그런 영화였다. 그리고 혼자 봐서 너무 다행이었다. 혹시라도 썸남과 봤다면 이동욱의 기럭지와 비주얼에, 순간 내 옆에 있는 그가 오징어로 느껴져 영화를 보고 나오며 괜히 툴툴대며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아니, 그가 먼저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잘생긴 남자에 대한 무의식적 질투가 담긴 언어로 이동욱이 연기한 캐릭터를 깎아내리며 내 여운을 와장창 깨부쉈을 것이다.


이동욱이 영화 속에서 진한 녹색빛 터틀넥에 차르르 떨어지는 같은 색상 롱코트를 걸친 장면을 여전히 머릿속에서 재생 중인데, 옆에 있는 오징어씨가 연애 많이 한 사람들의 머릿속은 전혀 이해하지도 못한 채 이동욱이 연기한 캐릭터에 대해 무심코 툭 던진 말로 내 머릿속의 아름다운 영상을 와장창 박살 냈을 것이다. 영화는 그래서 혼자 봐야 된다. 특히 자신의 인생에서 직접 앓고 지나가지 않고는 대사 한 문장, 한 문장이 가슴에 꽂힐 리 없는 이런 감수성이 섬세한 영화는 더더욱 혼자 봐야 한다.


‘혼자라도’가 아니라 ‘혼자라서 행복하다’는 말을 진심으로 이해하기까지 만 32년 하고 2달 정도가 걸렸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이 문장을 만났다. 혼자라서 행복하다는 것을 알기 위해 수많은 경험과 시행착오를 거쳤다. 자신 있게 웬만한 사람들보다 상위 분포에 위치한다고 말할 수 있는 수치는 “혼밥한 횟수 x 연애 횟수”이다. 그니까 나는 자신 있게 혼자 사는 삶과 혼자 노는 법에 통달했음과 동시에 연애를 시작하는 것에도 꽤 능숙하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연애를 끝내는 것도 꽤나 단련되어 있다.


이제는 썸을 끝내는 법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연애를 자주 끝내는 것보다는 썸을 제때 끝내는 것이 건강에 훨씬 좋으니까. 내가 연애에 대해 쓰는 글들도 미래의 내가 겪을지도 모르는 정신적, 신체적 위해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남자를 거르는 법, 썸과 연애를 제때 끝내는 법에 대해 상세히 적어 박제해 놓은 것들이다. 최근에도 나는 썸 타려고 했는데, 혼자 상상 속 나와 닮은 여자와 연애하고 있는 남자와의 썸을 종료했다. 우아하게 썸을 종료하는 방법 따윈 모르겠고, 점점 커가는 나의 스트레스 덩어리를 내가 소화할 수 있는 조각들로 잘라내고자 잡았던 약속을 싹둑싹둑 잘라 없애버리는 식으로 썸과 비슷한 것을 일단락 지었다.


내가 누군가의 판타지가 되는 일은 정말 크리피(creepy)하다. 밥 한 번 먹었을 뿐인데 남친 행세를 하길래 하루하루 스트레스가 쌓여가다가 딱 잘라냈다. 0부터 10중에 가장 차이가 큰 숫자는 0과 1이다. 밥 한 번이 문제다.


여기서 잠시 문장을 멈췄다. 진짜 그렇다. 밥 한 번이 문제다. 늘 밥 한 번이 문제였다. 밥 한 번 먹기 전에 생각을 정리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밥 한 번을 쉽게 먹으면 안 된다. 그 밥 한 번 때문에 판타지가 되었고, 러브바밍(love bombing)에 스트레스받다가, 혹여라도 사귀게 되면 헤어진 후 스토킹에 시달렸다.


썸을 탈 수 없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 중 하나가 나인 것 같다. 솔직히 나도 나랑 사귀고 결혼하고 싶다. 밥 한 번 먹으면서 대화 나눴을 뿐인데, 남친 행세 하고 싶은 그들의 마음도 이해는 된다. 적당한 외모에 털털한 성격, 그리고 그 어떤 있는 그대로의 찌질함도 다 받아줄 것 같은 관대함은 어디까지나 친구로서 이다. 여친 버전이라면, 나는 아무거나 안 먹고 아무 데서나 안 자려고 하는 까탈스러운 여친 그 자체이고, 휴가 때는 돈을 펑펑 쓰고 싶고 남자친구랑 옷 빼입고 전시회 가서 섬세한 것들에 대한 더 이상 섬세할 수 없는 돈 버는 것과는 하등 관계없는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싶은 사람이다.


내가 꿈꾸는 좋은 연애의 본질을 압축해서 표현하자면 맛있는 음식, 취미와 취향의 공유(예술과 스타일), 좋은 섹스이다. 돼지고기는 같이 먹을 수 있어야 해서 무슬림이나 유대교인은 안될 것 같고, 왁스로 헤어스타일링을 직접 하고 셔츠를 즐겨 입으며(체크, 줄무늬, 반팔은 안됨) 미술과 패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 얼굴이 턴온 포인트라 내 취향으로 잘생겼으면 좋겠다. 물론 얼굴 선이 아무리 아름답고 완벽한 좌우대칭을 이루어도 육체적 사랑에 필요한 그 곳이 제대로 각도를 만들어 내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왜 이 얘기꺄지 하냐고? 내 글은 드라마가 아니라 다큐다. 연애사의 씁쓸한 획을 빼놓을 순 없다.


내가 원하는 3가지 에센스를 나눌 수 있는 남자가 나의 까탈스러움을 감당해 준다면 3달을 넘길 수 있을 것 같다. 가치관이 중요하긴 하지만, 가치관 앞에 취미와 취향이 온다. 가치관이 안 맞으면 결혼하기 힘들 수 있지만, 그에 앞서 취향에 안 맞으면 연애를 지속할 수가 없다.


연애를 통해 얻고자 하는 행복의 본질이 충족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과 함께하느니, 아무 말이나 필터 없이 내뱉을 수 있는 남사친 1명, 조금 더 섬세한 감정을 교류할 수 있는 여사친 1명 이렇게 잘 통하는 친구 2명만 있으면 심심하지도 않고, 혼자여도, 아니 혼자여서 딱 행복할 것 같다. 잠시 남친 행세하던 스쳐갔던 썸남이 영화를 누구랑 봤냐길래 ”당연히 혼자. 싱글라이프가 최고인 듯. “이라고 답장을 보냈다.


뭐라도 되는 듯이 영화를 누구랑 봤는지 물어보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다. 밥 먹자고 한 남자가 있는데, 거절하라길래 이미 한 번 참았다. 나도 그 남자와의 식사가 내키진 않지만, 겨우 단둘이 밥 한 번 같이 먹은 사이인데, 내가 누구랑 언제 어디서 밥 먹든 이래라저래라 하는 사람은 더 내키지 않는다. 나도 너랑 그런 영화 같이 보고 싶다길래 더 이상 대꾸할 가치를 못 느껴서 답장을 안 했다. ”싱.글.라.이.프.가 최.고.인듯“에서 못 알아듣고 다음 말을 할 정도의 눈치라면 더 이상 대화할 필요를 못 느끼겠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너와 영화를 보고, 이것저것을 함께 하는 것보다 혼자서 영화를 보고, 혼자 집에서 넷플릭스보고 배달의 민족 시켜 먹는 것이 행복하다“ 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나의 생활 반경이 좁아진다. 사람들 모인 곳에 가기만 하면 불편한 일이 생기니까 피하고 싶은 사람들이 점점 쌓이고, 그러다 보면 고립되고, 고립되어 혼자만의 취미와 취향을 즐기다 보면 싱.글.라.이.프의 행복감을 만끽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점점 더 타인과 시간을 교류하는 것에 무의식적인 거부감이 커진다.


누군가를 알아가보고 싶었던 것이지 누군가의 판타지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고는 싶었지만 그 누구에게도 상상 속 완벽한 그녀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이동욱이 연기하는 박영호라는 캐릭터에 대해 모태싱글이냐고 여자 주인공이 묻는데, 누군가가 아니, 그는 못해싱글이었다고 말해준다. 연애를 쉰 적이 없었다가 연애에 쏟던 시간과 돈, 노력을 스스로에게 쏟기 시작한 후 싱글라이프에 만족하게 된 캐릭터이다.


못해싱글보다 더 싫은 것은 모태싱글 같은 남자의 판타지 그녀가 되는 일이다. ”후후“, ”I finally got you. “ 이런 크리피한 말을 절대 다시 듣고 싶지 않다. 못해싱글의 삶을 살 거라면 모태싱글은 만나기 싫다. 서툰 남자는 헤픈 남자보다 100배는 싫고 서툰 남자가 속으로 생각해야 할 말을 입 밖으로 꺼내면, 앞으로는 모두의 속마음 이상형인 잘생기고 잘 꾸미는 남자만 만나야겠다는 신념이 10배는 강화된다. 연애 몇 번 못했을 것 같은 사람과 밥 한 번 먹으면 머지않아 크리피한 말로 보상을 받는다. 이건 징벌이다. 잘 꾸미는 남자를 선택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일벌백계이다.


연애를 하다가 끝나면 혼자 보내는 주말이 두려웠다. 이제는 약속이 없는 주말이 설렌다. 삼 주째 주말에 집콕해서 넷플릭스를 보는데 행복하고 편안하다. 주말에 잡혀있던 약속들도 전날 취소했다. 내 공간에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도, 내 공간을 떠나 타인의 시공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편안하지 않다. 나와 감정의 속도를 맞춰서 썸 타줄 사람이 없다면 썸도 가볍지도 재밌지도 않다.


크리스마스 때 혼자 집에서 먹을 맛있는 케이크를 준비해야겠다. 나만을 위해 쓰는 돈은 어째서인지 조금도 아깝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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