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랑 잘 안되면 ~
If I can’t make it with you, I can’t make it with anyone.
- Daniel Cleaver
브리짓 존슨의 일기에서 바람둥이 다니엘(휴 그랜트)의 대사이다.
너랑 잘 안되면, 아무랑도 잘 될 수 없어.
마침 이 얘기를 하고 싶던 찰나에 옛날 영화 정주행 중 이 대사가 나왔다. 얼마 전 외국인 남자와 첫 데이트를 하는데, 어디선가 많이 들어봤던 말을 또 들었다.
“If this date went badly, I was going to not meet anyone and just take three months off from dating. “(“이 데이트가 잘 안 되면, 아무도 안 만나고 3개월 정도 데이트에서 완전히 쉬려고 했다. ”)
듣기 나쁜 말은 아니다. 내가 이 데이트에 가중치를 부여한 만큼이나 그도 꽤나 데이트를 기대했고, 나와 잘 통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이런 생각을 했고, 내게 말로 전달한 것일 테니까.
내가 데이트를 손꼽아 기다릴 정도 되는 훈남에 나이스가이라면 장기연애 경력은 필수에, 연애와 연애 사이의 여자들의 대시나 여자들과의 썸은 끊기지 않는다. 심지어는 나이스가이가 아니더라도 키 180cm 정도 되고 여자들이 데리고 다니기 부끄럽지 않게 적당히 꾸밀 줄 알고, 적당히 여자를 편하게 대할 줄 아는 남자라면 크게 애쓰지 않아도 여자들의 관심은 어딜가나 쉽게 받는다.
이런 남자들은 내가 웬만한 남자나 연애에 꽤나 시니컬한 만큼이나, 웬만한 여자나 연애에 시니컬하다. 쉽게 풀어 말하면 여자와 연애가 지금 시점의 인생의 남은 한 단추이기는 하나, 한편 그것들에 매우 피곤하고 귀찮은 상태이기도 하다.
적당히 관심받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없겠지만, 그 관심이 어느 순간 집착이나 드라마로 돌변하는 것에 질릴 데로 질려버린 사람들이 그들이다. 통계적으로 키 180cm 이상의 웬만한 여자들이 흔쾌히 사귈 것 같은 훈흔남들(훈훈한 남자에서 흔한 남자 사이의 그들)은 대게 내게 이런 뉘앙스의 말을 했다.
“너랑 잘 안 풀리면, 남은 생은 그냥 연애나 결혼 따윈 없이 혼자 살 거다. ”
들을 땐 좋다. 나랑 관계에 진지하구나. 결혼까지 생각하며 진지하게 임하는구나. 어떤 말보다 큰 안정감을 줬다. 손에 꼽는 듣기 행복했던 말이었다.
앞뒤의 뉘앙스나 그들의 연애 히스토리를 참작해 보면 아마도 진짜 속얘기는 이것이다. “전여자친구와 잘해보려고 많이 노력했고, 힘들 때도 정말 많이 참고 맞춰줬는데 잘 안 됐다. 연애에 너무 지쳤고, 사랑을 주는 것에 번아웃도 왔었지만, 그래도 너를 만나고, 네가 특별하게 느껴지고, 우리가 잘 맞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니깐 다시 한번 젖 먹던 힘을 짜내 연애라는 것에 나를 내던져 보려고 한다. ”
이것이 그들의 속마음이다. 그들이 “너랑 잘 안되면~, ” 으로 시작하는 말을 할 때, 그 순간만큼은 얼마나 진심인지, 그리고 속뜻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순간의 진심뿐이라는 것은 더 잘 안다. 나도 다시 남자와 연애에 나를 내던질 때, 정말 지쳤지만 한 번 더 젖 먹던 힘을 짜낸다. 유전자에 각인된 종족번식 본능인지는 몰라도 남자들에 질렸어도, 지금 내가 만나고 싶은 그 남자는 새롭고 설레고 궁금하다. 논리와 이성을 넘어선 이상한 희망을 계속 품게 되는 게 내겐 남자와 연애라는 장르이다.
절친이 내가 일 년 동안 ‘누구랑 결혼할 것 같다‘, ’OO이랑 결혼각?‘이라는 말을 사람 이름만 바꿔서 5번 했던 것을 카톡 캡처해서 보내줬다. 누구 만나면 결혼각부터 재다가 2달은커녕 2주도 안 돼서 정리하길 반복해서 세상 가벼운 인스턴트 연애녀에 양치기소녀 칭호가 붙었다. 사랑에 누구보다 진심이고 올인인데 너무나 애석하고 말도 안 되는 칭호이다.
관심도 받아본 사람이 받고 사랑도 해 본 사람이 한다. 결혼각을 일 년에 다섯 번 재는 나나, 그런 나와 데이트하며 너랑 잘 안되면, 여자 안 만나겠다는 그들이나 본질은 똑같다. 그래서 아마 이따금씩 이들이 끼리끼리 만나 불타오르는 것이다.
우리는 늘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다. 이 사람에게 결혼각 잴 만큼 진심이다가 곧이어 또 다른 사람에게 결혼각 재는 나도, 전에 데이트했던 여자에게 이번이 마지막 연애일 것처럼 얘기하다가, 헤어지기가 무섭게 모임 참석 버튼 열심히 누르고, 데이팅 어플 열심히 스와이프 Right 하는 그도 다 똑같다.
사랑이 존재의 전부인 Libra(천칭자리) 나도, 테스토스테론을 주최할 수 없는 훈흔한 알파메일 그도 다 똑같다. 사랑의 유전자를 널리 널리 퍼뜨리고 싶은 존재의 장난 그뿐이다. 순간의 사랑에 진심인 우리는 그 누구보다 눈앞의 사람에게 스윗하고, 그 누구보다 다음 사랑에도 빨리 빠진다.
진실은 이렇다.
If I can’t make it with you, I will make it with someone ASAP saying the exact same thing to the next one.
만약 너랑 잘 안되면, 순식간에 다음 사람에게 똑같은 말을 속삭이며 최대한 빨리 잘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