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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센스 Mar 17. 2024

거리의 문제, 그리고 사랑의 다섯 가지 언어

좋은 연애고 이별이었다, 제 때 끝났기 때문에

좋은 연애였다. 함께한 날짜가 그리 길지 않았지만 함께 나눈 시간은 충분했고 밀도 있었다. 장점과 단점을 알아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만약에 이랬더라면”에 매몰돼 스스로를 탓한다거나, 그에 대해 알아가지 못했던 면들로 쌓은 환상을 좇아 스스로를 희망고문 하는 일 따윈 없을 것이다.


사랑받지 못했다거나 내가 더 많이 사랑하고 베풀었다고 생각하면 조금 억울한 생각이 들지 몰라도, 충분히 사랑받고 이해받았다고 생각해서 억울하지도, 아쉽지도 않다.


처음에는 사랑의 다섯 가지 언어를 다 채워줬다. 인정하는 말, 함께 하는 시간, 선물, 봉사, 스킨십까지… 충분히 넘치게 사랑받고 표현받는다고 느꼈다.


관계의 마지막에는 퀄리티 타임(서로에게 온전히 집중하며 함께하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꼈지만, 그 역시 더 이상 나에게 별로 해주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고, 그런 상황에서 이별을 고했다.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을 내어줄 수 있는데 안정감과 시간이 없는데 내게 그것들을 내어줄 수는 없었다. 그런데 나는 그 무엇보다 관계에서 그 두 가지가 중요한 사람이었다.


나는 안정감을 줄 수 있고, 내게 시간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좋은 사람과, 그리고 내가 너무 많이 좋아했던 사람과 끝나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슬프지만 그래도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그의 감정기복과 불안에 따라 내 마음이 함께 요동치는 일은 이제 없을 것이다.


그에게 다시 물어봤다. 나에 대한 확신의 부족이냐고 거리가 문제냐고 물었다. 그는 거리라고 답했다.


엊그제도 거리가 가까웠으면 달라졌을 것 같냐고 물었는데 그는 그랬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어서 나에 대해 확신을 느끼는 것은 맞냐고 물었다.


처음에는 백 퍼센트 확신했었는데 갈등이 몇 번 있은 후로는 마음의 벽을 조금 쌓았다고 했다. 나는 거리의 문제로 헤어지는 것이 심정적으로 이해가 안 돼서, 결국 나에 대한 확신과 사랑이 부족한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런데 그는 다시 장거리연애가 문제라고 확실하게 이해시켜 줬다. 너는 나를 응원하고 지지해 준 것 밖에 없다. 그냥 롱디의 연애스타일이 힘들다고 했다.


이제야 나는 우리가 헤어져야 하는 이유가 확실히 납득이 됐다.


나는 롱디가 처음부터 아예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선호사항이라면 선호사항이었다. 나의 가장 중요한 사랑의 언어는 봉사라고 생각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게 시간을 들여 봉사하는 것, 오히려 봉사보다는 “시간”에 무게추가 실려있었다.


오래 사귄 전남친에게 가장 사랑받는다고 느꼈을 때는 한 시간 동안 운전해서 내가 좋아하는 마카롱을 파는 카페에 가서 그 마카롱을 픽업해서 다시 한 시간 동안 운전해서 갖다 줬을 때였다.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업체에서 마카롱을 집 앞으로 배송해 줬으면 그렇게 감동하고 이렇게 오랫동안 기억하지 않았을 것이다.


롱디를 하면 자연스럽게 서로를 만나러 오는 데 “시간“이 소요되고, 그 시간을 들이는 것 자체가 내겐 사랑의 표현이고 언어였다. 그래서 롱디를 성공적으로 지속하면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마음이 적립되고 관계가 굳건해지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서로와 최대한 오래 함께하기 위해 일상생활 유지가 가능한 선에서 최대한 일찍 만나러 가려고 하고, 최대한 막차를 타고 오려고 하는 부분이 내게 사랑의 표시였다.  나와 전남자친구의 노력으로 2년 반동안 그렇게 난 이미 롱디를 해봤었다.


그래서 자신 있었다. 오히려 좋았다. 평일에는 일, 운동, 공부, 모임 등 일상을 지키고, 주말에는 서로를 위해 시간을 들이는 것이 좋았다. 2주에 한 번 보는 것은 서로 한 달에 한번 꼴로 장거리를 오가는 것인데, 그것조차 못하면 연애에 대한 최소한의 의지가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의 생각을 들어보니, 아예 이 부분에서 사랑의 언어가 달랐던 것이었다. 그는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고, 함께하는 주말은 온전히 서로를 위한 주말이니까 힘들다고 했다.


모든 일상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보내고, 시간이 나고 보고 싶을 때 틈틈이 연락하거나 만나는 것을 선호하는 것 같았다.


이 부분은 나와 완전히 달랐다. 내게는 시간을 만들어서 따로 떼서 연인에게 연락하고 만나는 것이 사랑을 느끼게 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아마 내가 부산에 있었더라도 결국 같은 이유로 나는 오히려 더 서운함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예를 들면 토요일이나 일요일 중 하루를 온전히 연인을 위해 쓰길 바라는데, 그는 평일에 잠깐씩 보고 주말에 몇 시간 보고 이런 식의 연애를 선호했을 것 같았다.


내가 그의 인생에 완전히 없다가 완전히 있는 게 싫다고 했다. 나는 사실 그런 예측가능성이 좋았다.


평소 연락패턴도 그는 하루종일 틈틈이 카톡 하고 밤에는 9시 부근만 되면 잔다고 하고 쌩 자러 갔는데, 나는 카톡으로 인사 정도하고 시간을 내서 서로에게 온전히 집중해서 통화를 하는 것을 선호했다.


만나는 동안은 이 부분의 불만도 최대한 참았다. 그래도 주말에 만날 땐 같이 오래 있으니까라며 타협했다.


결국에는 롱디가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언어가 달랐고, 원하는 만남이나 연락 패턴이 달랐다.


틈틈이 말고, 나는 인생의 일부라도 온전히 집중받고 사랑받고 싶었다. 결혼하면 그게 어려워질 수도 있지만, 연애할 때라도 서로에게 하루의 일부, 일주일의 일부라도 최고의 집중을 보이는 시간을 쌓아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게 잠시도 온전히 집중할 수 없고, 시간을 쏟을 수 없는데 연애를 끌고 가며 상처를 계속 주는 것보다는 솔직하게, 어떻게 이직준비와 연애의 균형을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이 나았다.


내가 극복한 것이 많았다고 생각했는데, 롱디 역시 나와 함께하기 위해 그가 싫어하는 것을 극복했던 것이었다.


이별은 아프지만, 그를 알아갔던 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 사랑할 땐 서로에게 최선을 다해 모든 것들 쏟았고, 이별할 땐 최대한 덜 상처 줄 수 있게 빠르게 이별했다.


미래를 약속했던 말들, 사랑을 손에 잡히는 것처럼 만들어주었던 그 무엇보다 강한 확신의 말들이 이별의 순간에 마치 제대로 된 사랑이 존재한 적 없었던 것처럼 보이게 하지만 사랑은 한국어나, 영어 같은 언어 이상의 모든 언어로 분명히 존재했다.


그는 분명히 내게 사랑을 주었고, 나는 분명히 받았었다. 그리고 더 이상 내가 원하는 방식의 사랑을 줄 수 없을 때 떠나는 것을 택했다.


내가 갑자기 죽는다고 해도 마지막 순간까지 내 연인이 내게 사랑받았다고 느꼈다고 느낄 수 있게 사랑을 표현하자고 마음먹었었다.


그는 내게 미안하다고, 내가 사랑받는다고 충분히 느끼지 못했던 순간에도, 그에게 무조건적인 지지와 사랑을 줘서 고맙다고 했다.


우리의 짧았던 시간은 눈부셨던 부산 바다의 윤슬만큼 빛났다. 한때나마 지금까지 연애하며 느꼈던 중 최고의 사랑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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