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휴식을 위한 셀프 처방전
휴식에 관심이 많아져서 밀리의 서재에서 휴식을 검색했다. 휴식에 대한 책을 찾아보던 중에 문요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쓴 오티움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그의 다른 책들도 기존에 우연찮게 발견해 흥미롭게 읽었던 터라 믿고 오디오북을 재생했다.
내게 딱 필요한 지점을 말해주는 책이었다. 그냥 쉬는 것으로는 소진되었다는 느낌이 해소되지 않고, 나를 진정으로 즐겁게 하는 것에 몰입해야 완전한 휴식이 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그의 책 제목이기도 한 오티움이란 ”내 영혼을 기쁘게 하는 능동적 여가활동“이라는 의미의 라틴어이다.
어떤 활동이 오티움이 되려면 무엇보다 자기목적적이어야 한다고 한다. 즉, 그 활동이 다른 목적을 위한 활동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히 몰입되고 즐겁고 나를 채워줘야 한다고 한다. 이 부분에서 분명 일만 하는 것이 아닌데도 요즘 왜 이렇게 지친다고 느꼈는지, 그리고 내 삶에 어떤 것이 결핍되어 있어서 그랬는지 깨닫게 되었다.
오늘의 브런치 유입키워드 중에 “벤치에서 잘 자는법”이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도 언젠가 이 여가 생활을 말해줬던 것이 인상 깊었는지, 만나면 요즘에도 벤치에서 낮잠 자냐고 묻는다. 그러고 보니 텐트나 대단한 장비 없이 밖에서 자는 것은 요즘 뜸해진 나의 오티움 중 하나였다.
문요한 저자에 의하면 오티움의 다른 조건에는 일상성, 주도성, 깊이와 지속성, 배움과 새로운 실험을 통한 성장 경험이 있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이면 일상적으로 벤치에 가서 낮잠을 시도했고, 주도적으로 공원이나 적당한 그늘이 있는 양지바른 곳을 찾아가 누웠고, 낮잠의 깊이와 시간을 지속적으로 늘려갔으며, 벤치에서 편안하게 낮잠 잘 수 있는 준비물을 갖춰나가며(바람막이, 모자, 더러워져도 되는 옷, 헤드폰은 흘러내려서 헤드폰보다는 이어폰) 새로운 시도를 통해 밖에서 잘 자는 법을 학습했다.
부족한 밤잠을 보충한다거나 나를 아는 사람들과 차단되어 탁 트인 곳에서 완전히 푹 쉬고 싶다는 목적이 있었지만 휴식이 목적인 휴식이었으므로 오티움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밖에서 낮잠 자기는 나무 주변에서 새소리를 들으며 따뜻한 햇살을 쬐는 포근함 자체를 즐기며 나의 영혼을 진정으로 채우는 활동이었다.
그 오티움을 왜 멈췄나 생각해 보니, 내 오티움 스폿이 더 이상 사적인 공간이 아니게 되어서였다. 물론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정지돈 작가 책제목에서 따옴) 공공장소에서의 낮잠이었지만, 내가 차지하는 시간 동안만큼은 나의 사적인 공간이었다. 어느 날, 그 공공장소들에서 특정한 시간을 공유할지도 모르는 지인을 알게 된 후 낮잠을 들키고 싶지 않아져서 나의 특별한 여가를 멈추게 되었다.
이렇게 다시 생각하게 되고 나니, 대체할 수 없는 기쁨과 휴식을 주는 오티움을 재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밖에서 낮잠 자는 것만이 오티움은 아니었다. 혼자 산책하기, 요가하기, 에세이 읽기와 쓰기도 오티움이라면 오티움이었다. 혼자 힘차게 걸으며 눈앞의 풍경과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내는 창의적인 생각에만 집중하는 것이 즐거웠다.
요가도 처음에는 집중력을 향상시키고 마음을 차분하게 하자라든지, 몸을 움직이는 시간을 늘리자라는 목적으로 시작했지만 하다 보니 한 시간 동안 멈추지 않고 내 호흡에 집중하는 것 자체가 좋아서 계속하게 되었다.
에세이를 읽으며, 타인의 내면과 소통하는 것이 나의 내면을 치유했고, 브런치에 에세이의 형태로 내 얘기를 털어놓으면서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비움의 자유를 누렸다.
내게 오티움이란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타인의 생각과 말에 휘둘리지 않고, 나의 호흡과 생각, 움직임을 고요히 따라갈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에세이를 읽는 것 역시 수동적으로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책, 그리고 글을 읽으며 완전히 저자의 관점에 몰입해 공감해 보는 깊이 있는 경험이었다.
어떤 활동이 비교적 최근에 나를 채워줬는지 생각해 보니, 어떤 시간을 늘려야 영혼의 휴식에 다가갈 수 있는지 손에 잡힐 듯했다. 글 외에 형태가 있는 창작을 하고 싶어서 예술을 창작하는 취미를 가지고 싶었는데, 결과물의 모양이 정해져 있고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따라서하며 배우는 활동은 내게 오티움이 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이 결과물로 나타날 수 있는, 캔버스에 그림 그리기나 내가 원하는 모양으로 창작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예술 활동을 해야 내게 오티움이 될 것이다.
여가 시간에 사람들과 함께 하는 활동으로 1년 정도 독서 모임을 해보고 있는데, 혼자서는 안 읽는 책을 읽고 내 이야기도 하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새로운 것들도 배운다는 생각으로 꾸준히 했지만 몇 달 전까지도 재미가 없었다. 좋은 사람들을 알게 되고 영감도 받았지만, 독서 토론 자체는 즐겁다기보다는 오히려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에 가까웠다.
그런데 발제문이 미리 주어지는 형태로 바뀌고 나서 최근 몇 달 새 모임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전에는 누군가가 즉석에서 막 쓴 자기계발서를 듣는 기분이었다면, 요새는 사람들의 살아있는 에세이를 이야기로 듣는 느낌이다. 서점에 가서 에세이를 찾아 읽거나, 브런치 작가들의 글을 이야기로 듣는 기분이다. 사람들과 교류를 할 때는 에세이처럼 깊이 있는 교류를 하면 영혼이 채워지는 느낌을 받는구나 싶었다.
오늘 아침 눈을 떴는데, 혼자여서 너무 좋다란 생각이 제일 먼저 머리를 스쳤다. 그동안 나는 외로움이나 공허함을 사람으로 채우려고 부단히 애썼다. 나무 벤치나 햇살의 도움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사람에게 기대고 싶었다.
나의 공간을 아늑하게 꾸며놓고 내가 좋아하는 활동들을 하다가 푹 자고 일어나 아침을 맞는데 진정으로 편안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사람은 외로움이나 공허함 같은 것들을 잠시 채워줄지 모르지만 지친 마음을 채워주는 것은 진정한 휴식이다. 그리고 그 휴식은 내가 나를 잘 알기 위해 노력할 때, 그리고 나의 시간을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울 때 찾아온다.
나보다 다른 누군가를 더 사랑하느라,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들에 더 몰입하느라 내 휴식을 잠시 잊고 지냈던 것 같다. 이제는 내가 좋아했던 것들을 다시 내 삶에 찾아오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