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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센스 Apr 19. 2024

누군가 내게 행복하냐고 물었다

들판에 핀 꽃 같은 행복에 대한 가벼운 에세이

누군가 내게 행복하냐고 물었다.


불행한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럼 좋은 것 아니냐고 했다. 그런 것 같다고 했다.


공원을 산책하는데 진한 초록색 풀잎 사이로 총총 피어나 있는 민들레들을 발견했다. 싱그러워 보였다. 화려하지 않고 수수하게 예뻐 보였다. 작은 보물을 찾은 것처럼 즐거웠다.


휴식이 필요해서 마르코오빠(절친 오빠)랑 템플스테이 얘기하다가 전연애들 때문에 마음이 힘들다고 했다. 그랬더니 “재밌는 이야기 해줄게. 들으면 기운 날 듯. ”이라며 웃긴 얘기를 해줬다.


이야기가 너무 절묘해서 만든 이야기냐고 물어봤는데, 원래 알고 있던 이야기라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천 개쯤 알고 있다고 한다. 가벼운 힘듦에 가벼운 이야기로 위로해 주는 T의 따뜻함이 몽글몽글하게 감동적이다.


말 한 사람도 웃기고, 듣는 사람도 웃겨서 카톡창 ㅋㅋㅋㅋㅋ거리며 뒹굴거리는 이모티콘과 깔깔거리며 다리 흔드는 이모티콘이 굴러다닌다. 최애 이모티콘들이다.



주식이 전체적으로 폭락했을 때는 펑펑 우는 곰돌이의 눈물로 만들어진 눈물바다에서 토끼가 헤엄치는 삼단 콤보 이모티콘을 썼는데, 마르코오빠가 그 사람한테 연락 안 왔나 보네?라고 한다. 상관없다고 했다. 그의 어장에서 헤엄치는 해일리라고 했다.


뜸하게 연락이 오는데 연락이 오면 기분이 좋다. 오랜만에 연락이 왔던 날은 티 나게 기분이 좋았다. 번아웃을 겪고 있어서인지 썸 타는 것보다는 어장에 있는 쪽이 마음이 편하다.


마르코오빠가 그 남자의 연애전략에 대한 챕터 1~5를 즉석에서 만들어서 공유했는데, 뜸하게 연락하기가 챕터 1이다. 챕터 1만 해도 넘어갔냐고 한다. 사실 지금 내 상황에서 사귀지도 않는 사람이 아침마다 “좋은 아침이에요!”라고 하고 밤에는 “자요?”라고 말을 걸면 너무 지칠 것 같다.


연락할 이유를 만들어내 적당할 때 연락하는 뜸함이 일상 속 소소한 기쁨을 준다. 거의 늘 연애 중인 나의 틈을 파고들어 타이밍을 잡아 나와 뭔가를 해보려고 하나 보다라는 묘한 압박감과 불편함이 아니라 누군가 나를 그래도 종종 생각하고 내게 관심을 주나 보다는 편안함이 작은 기쁨을 준다.


회사에서 먹고 싶지도 않은 간식을 누군가가 내 책상에 하루가 멀다 하고 툭 두고 가는 것보다는 좋아하는 간식을 모르게 사서 간식창고에 툭 채워놓았을 때 훨씬 기쁜 것과 같다. 작년 이맘때 프레첼에 꽂혀 간식으로 프레첼을 계속 먹다가, 와사비도 좋아해서 와사비맛 프레첼을 한 번 먹어봤는데 코가 뻥 뚫리고 머리가 알싸하게 아파오는 띵한 맛에 와사비 프레첼에 약간 중독됐었다.


와사비 프레첼에 대해 아예 잊고 있었는데 1달 쯤전 감정기복이 좀 심하지만 알고 보면 매우 섬세한 ESFJ 선배가 와사비 프레첼을 간식 주문하면서 샀을 때 은은하게 기분이 좋았다. 작년에는 좋아했는데, 올해는 와사비 프레첼이 그렇게 당기지 않지만 내가 한 때 좋아했던 간식이 간식 창고의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묘하게 좋다.


마음이 조금 힘들어서 공원을 빨리 걷거나 뛰고 싶었다. 그러면 생각을 조금 없앨 수 있을 것 같았다. 같은 것에 대해 1달째 골몰하고 있었다. 지난 연애와 이별에 대해 긍정적으로도 생각하려 했다가, 부정적으로도 생각했다가, 고맙다가, 배신감에 너무 괴롭다가 미웠다가 했다.


집에 치약이 떨어져 치약 한 개를 사야 했는데 사러 가기가 귀찮아서 홈플러스에서 배송을 시켰다. 다른 식료품도 함께 주문하자 싶었다. 목살이 할인하길래 목살을 사놨다. 양이 많으니까 마르코 오빠에게 먹으러 오라고 했다.


그날 마침 전남친에게 인스타그램 언팔을 당했다. 헤어지면 팔로우 끊는 게 자연스러워서 그것 자체는 괜찮았고 나도 발견하자마자 언팔을 했는데 괴로웠던 이유는 다른데 있었다. 헤어진 지 한 달도 안 돼서 새 여자친구가 생긴 것 같았다.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추정해 보건대 높은 확률로 그랬다. 그래서 언팔한 것 같았다. 새 여친이 내 인스타를 볼 수 있고 내 브런치도 읽을 수 있으니까 그런 것 같았다. 맺고 끊는 것에 확실하지 않은 그가 굳이 깔끔하게 정리하려고 나를 언팔한 것 같지는 않았다.


머지않아 연애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그전부터 했다. 물론 인스타그램을 통해 알았다. 럽스타그램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팔로잉과 팔로워 목록에서 추정할 수 있었다. 인스타그램은 정말 번뇌를 일으키는 창고다. 안 하는 것, 모르는 것이 곧 평안이고 행복이다.


고기는 사놨으니까, 양파와 쌈, 마늘을 사서 오라고 했다. 그날 저녁에 기분이 팍 가라앉고 풀 죽어서 언팔 당한 얘기와 그 이유를 얘기하는데, 마늘 썰고 있는 나를 보며 마르코오빠가 노래를 부른다.


너마늘 사랑한다 했잖아 ~~ (코요테 - 실연 멜로디)



풀 죽었었지만 노래는 못 참지. 신나게 같이 마늘쏭을 부른다.


나마늘 사랑한다더니 버리고 떠나가 새 여자 만나는 놈도 있지만, 같이 마늘 노래 부르는 절친도 있다.


아무리 슬프고 힘들어도 우리는 늘 유쾌하다.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내서 행복할 수 있으면, 이렇게 행복을 자가발전 할 수 있으면 행복의 효율이 굉장히 높은 것이 아닌가 싶다.


재미를 늘 만들어내며 살고 있다. 그리고 재미있는 사람들을 주변에 가까이 두고 지낸다.


과거의 고통이나 불행 같은 것들이 현재의 나를 힘들게 할 수는 있지만 불행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김윤나 작가의 당신을 믿어요라는 책에 “행복은 어렵게 피우는 난꽃이 아니라 발길에 차이는 들꽃과 같다”는 구절이 나온다.


하루의 틈바귀에 공원에 나가 누군가가 정성스럽게 심어놓은 꽃이나 아무도 기다리거나 기대하지 않았는데 올해도 자기 힘으로 피어난 꽃을 보며 언제나, 누구든 가져다 쓸 수 있는 것이 행복이 아닌가 싶다.

예상치 못한 때에 누군가 내게 행복하냐고 물어봐주는 일, 친한 친구와 아무 말이나 주고받으며 깔깔 거리며 하루하루 쌓아나가는 웃음이 진짜 행복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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