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에 땅에서부터 후끈 열기가 오르는 한여름이 되었다. 땀이 많은 나는 아직 햇볕의 열기가 땅에 완전히 전달되지 않은 오전부터 콧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한여름이 왔다는 것은 해가 있는 동안 밖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대도시, 대도시 안에서도 회사원들이 밀집한 지역의 사무실 안에서 일하는 나는 홀로 잠시 바깥을 산책할 때만, 그리고 벤치에 앉아 시선을 아무 곳에나 자연스레 꽂히는 곳에 잠시 안착시켜 놓을 때만 비로소 진정한 충전에 다가갈 수 있다.
책상이 그렇게 좁지도 않고, 아직 파티션이 남아있어 그렇게 개방적이지도 않은, 운 좋게 자리까지 구석져서 시선으로부터 꽤나 보호될 수 있는 곳에 앉아있을 수 있으면서도 탁 트인 곳에서 타인과 한참 떨어져 존재하며 시간의 움직임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는 일상의 틈을 갈망한다.
회사에 휴게실이 구비되어 있지만, 폐쇄된 곳에서 다닥다닥 공동 휴식을 취해야 하는 공간에서는 진정한 휴식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문이 굳게 닫힌 공간 속에서 타인의 숨소리와 감정 상태가 공기를 타고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진다.
미리 약속된 계획이 없이 급작스럽게 이틀 연속 나의 연인이 찾아왔다. 하루는 보고 싶어서 왔고, 하루는 서프라이즈 선물을 주기 위해 왔다. 나 역시 보고 싶던 찰나에 만나서 기뻤고 그의 열정에 한편으로는 조금 안도했다. 나의 고요하고 조금은 고정된 일상에 변주를 주는 관계와, 그가 나로 인해 그의 일상에 변주를 줬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감사했다.
변주는 아름답지만 자극이고 자극은 일종의 스트레스이다. 스트레스가 없으면 일상은 지루하기 짝이 없고 지루함이 계속되면 공허감에 사로잡힌다. 일상을 공허함과 무의미에서 탈출시켜 주는 것이 곧 자극이고 변주이다.
하지만 예민한 사람은 명작 영화를 보고 나서도, 명작 음악을 듣고 나서도 잠에 빠져 외부의 아름다운 자극을 무의식의 문제들과 희석시켜 버려야 견딜 수 있다. 자극을 세상과 분리된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충분히 낮은 농도로 만들고 나서야 다시 그 자극을 내 나름의 가장 적정한 농도로 글로 풀어내 기억을 박제해 놓을 수 있게 된다.
혼자만의 시간이 간절해졌다.
그래서 목요일 오후부터 금요일까지 휴가를 냈다. 일상의 루틴을 사랑하는 나는 휴가가 한참 남았다. 출근해서 일기 써야 하고 회사 근처에서 요가해야 하는 나는 여행 가거나 몸이 아프지 않은 이상 휴가를 잘 안 내곤 했다.
부장님이 지나가면서 계획이 있냐고 물었다. 그냥 쉰다고 했다. 너무 솔직하다고 했다. 그냥 쉰다고 하면 오히려 뭔가 숨기고 둘러 덴다고 생각할 법한데, 나를 잘 아는 건지 계획이 없다는 대답이 솔직하다고 했다.
아침에 마신 커피잔을 씻으려고 탕비실에서 또 마주쳤는데 목, 금, 토, 일 4일인데 여행 가도 되겠다고 했다. 마음속으로 여행을 떠날 수 없는 그날 그날의 일정들이 다 있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말하지 않고 그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원래대로라면 퇴근하고 붐비는 지하철에 몸을 싣고 독서모임을 하는 카페로 향해야 하는데 오늘만은 퇴근 시간 붐비는 대도시의 지하철을 견디기 싫어서 휴가를 냈다. 잠시라도 밖에 혼자 앉아 홀로 있고 싶은데 그러기에는 날이 너무 뜨거워 휴가를 냈다.
걷거나 지하철만 타던 내가 버스를 타고 마포대교를 건너 지지난 달 배달된 매거진에 나온 에스프레소바에 왔다. 버스를 타고 바깥 풍경을 보며 한강을 가로지르는 기분이 위안이 됐다. 연인과 함께 가야지 했던 카페에 혼자 가는데 묘한 해방감에 휩싸였다.
그를 알게 되기 전부터 가려고 마음먹었던 카페인데 나의 일상의 변주를 왜 굳이 새 연인과 함께하려 했을까 싶었다. 내가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완벽하게 스스로 통제가능한 믿음이 환기되어 마음이 다시 편해졌다.
누군가 함께 여행 가자고 하지 않아도, 혼자 떠나는 여행 계획이 없어도, 붐비는 대도시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지켜내겠다는 결심과 내게 주어진 여유에 감사하다.
계획이 있어서 휴가를 내는 것이 아니라, 내 일상에 오로지 나를 위한 변주를 삽입할 계획을 만들 틈이 필요해 휴가를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