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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센스 Jun 24. 2024

도플갱어의 만남

독서모임하는 카페에 남자친구가 도착했다. 자연스럽게 인사하며 비어있는 가운데 자리로 안내했다. 처음 본 상의를 입고 있었다.


그가 커피를 찾으러 간 사이에 마르코오빠가 도착했다. 요즘 계속 보던, 친누나가 여자들이 이런 스타일 좋아한다며 사줬다는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는 독서모임에 나올 때는 가지고 있는 옷 중 제일 깔끔한 옷을 입고 나오곤 했다. 나와 둘이 만날 때는 각자 가지고 있는 옷 중 가장 실용적이고 편안한 옷을 입고 나와, 실루엣부터 옷에 실밥이 터진 위치까지 비슷한 의외의 커플룩이 되곤 했는데 모임에서 만날 때는 깔끔해서 늘 놀라웠다.


딱 남자친구의 옆자리가 비어있어 마르코오빠에게 그 자리를 안내했다. 마르코오빠가 요즘 모임 나올 때 교복처럼 입는 흰 바탕에 하늘색 스트라이프가 새겨진 반팔셔츠와 남자친구가 오늘 처음 입은 흰 바탕에 하늘색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롤업한 긴팔셔츠를 나란히 보고 있자니 웃음이 새어 나와 표정 관리가 안될까 봐 마스크를 썼다. 스트라이프의 줄 간격과 매칭해 입은 연청바지의 색상마저 같아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가장 친하고 편안한 사람과 가장 사랑하고 편안한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둘이 이렇게 약속이라도 한 듯이 옷도 맞춰 입고 나오다니 인생은 참 나를 위해 가장 재미있는 버전으로 준비되어 있구나 싶었다.


자신의 옆자리에 내 남자친구가 앉아있다는 것을 알아챈 마르코오빠는 내게 유쾌한 눈짓 신호를 계속해서 보냈다. 남자친구는 최대한 진지한 척을 하며 성실하게 토론에 임했다. 독서모임의 발제문에 그가 답하는 것을 들으며, 그에 대해 몰랐던 것들이나 내게 어렴풋이 말해줬지만 더 구체적으로는 들려주지 않았던 과거의 경험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를테면 그가 스타트업에서 일했을 때 그 회사에서 출시했던 서비스가 잘 안 됐던 일과 그 일로 깨달은 점이나, 계절마다 같은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데 여름에는 포레스트검프를 보고 겨울에는 러브 액츄얼리와 패밀리맨을 본다는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그날 그의 옆옆 자리에 앉아있던 지난달부터 이 모임에서 보게 된 분이 ISFP였는데 이 분이 자기도 같은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겨울마다 러브 액츄얼리를 본다고 했다. 남자친구가 처음에는 내게 ISFP라고 했고 그다음에는 ISTP라고 했는데 그냥 반반인 것 같았다. 사실 정서지능이 높고 자신의 감정과 그 감정을 표현하는데 솔직한데, 이성적 사고도 잘되는 그런 사람 같았다.


마르코오빠는 언제나처럼 모든 발제문에 사람들을 웃기기 위해 임했다. 나중에 남자친구가 이 형은 원래 그렇게 웃기려고 무리수를 계속 두는 타입이냐고 했다. 웃기려고 작정하고 노력하는 것은 맞지만, 아마 한 얘기는 사실일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영화관에서 본 영화가 아바타 원이라고 했는데, 마르코오빠가 나랑 비슷해서 돈 버는 일이나 진짜로 좋아하는 것에 몰입하는데 말고는 시간을 잘 안 써서 아마 그럴 수도 있다고 했다.


독서 모임이 끝나고 둘을 데리고 미리 생각해 둔 펍으로 갔다. 처음엔 둘이 나란히 걸었는데, 커플룩이라서 둘이 커플인 것 같다며 나보고 가운데서 걸으라고 해서 가운데로 왔다.


펍에 도착해 둘러앉아 대화하기 좋은 창가 쪽 라운드 원테이블로 향했다. 셋이 입맛도 비슷해서 돌솥에 나오는 이베리코 구이와 피자를 시켰다. 마르코오빠는 아무거나 잘 먹는다는 것을 알아서 조금 더 섬세한 남자친구에게 무슨 피자를 먹을 것인지 물었다. 그는 마르코오빠에게 페페로니나 고르곤졸라 둘 중에 어떤 것이 괜찮냐고 물었다. 짠 것과 단 것 중에 뭐가 좋냐고 했다.


단 것을 좋아한다며 마르코오빠는 고르곤졸라를 먹겠다고 했다. 그때부터 속은 완전히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둘이, 그리고 나까지 셋이 죽이 잘 맞는 것처럼 느껴졌다.


술은 잘 못 마시는 남자친구와 술을 잘 안 마시는 마르코오빠는 콜라를 시켰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해서 기분 좋을 때는 술이 술술 들어가는 나는 생맥주를 연이어 마셨다.


따끈따끈한 피자를 먹다가 마르코오빠가 문득 남자친구에게 “얘, 외모 엄청 보거든” 이라며 남자친구에 말을 붙였다. 외모 엄청 보는데, 잘생겨서 해일리가 좋아할만하다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곧이어 “얘 전남친들 다 잘생겼어. ”라고 했다.


나도 모르는 새 주먹이 불끈 쥐어져 마르코의 팔뚝으로 있는 힘껏 펀치를 날리고 있었다. 진짜 아프다고 했다.


남자친구가 전남친에 대한 질문을 하려고 하자, 나는 곧 마르코오빠를 째려봤다. 남자친구는 눈빛이 반짝이고 재밌어하는 눈치였다. 오늘 오길 잘했다고 했다.


내가 잠자코 있어도 그들은 그들의 공통점이나 오늘 독서 모임에서 알게 된 공통 관심사를 꺼내며 편안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저번에 우연찮게 그들이 동성동본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서로에게 이야기해 줬는데, 집안 소유 토지가 소송 걸린 이야기라든지 mbti 마저 같은 그들의 mbti 이야기라든지, 카이로프랙틱에 대한 이야기라든지를 하며 전혀 어색하지 않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나까지 셋 다 I인데도 어색함 없이 너무나도 편안하고 자연스러웠다. 나와 결과 취미가 제일 잘 맞는 작년에 사귄 가장 친한 오빠와 놀랍도록 나와 취향과 사고방식이 닮은 남자친구가 처음 만났는데도 기본적인 애정을 깔고 서로를 대하는 것을 보니 이제야 나와 딱 맞는 짝을 만났구나 싶었다.


마르코오빠와 작년 겨울에 같이 어울리며 우리 친척 같다며 사람들한테 그냥 친척이라고 말하자고 했었는데, 남자친구를 통해 진짜 절친 오빠와 예비 친인척 관계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운명 같았다.


어제 통화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남자친구는 좋아하는 친구 소개해줘서 좋았다고 했다. 흔한 본관이 아닌데 운명 같고 특별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세상에 많은 것들이 변하더라도 이 두 사람과의 관계만 지켜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나의 다른 버전의 도플갱어들. 그리고 도플갱어이자 패밀리인 이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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