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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센스 Oct 14. 2024

행복은 발밑에 있다고 생각했던 내가

남자친구가 여행을 떠났는데 왜 내가 행복하지 않아졌을까

행복은 발밑에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서있는 곳에서 땅에 발을 한 발씩 내딛을 때 행복할 수 없다면 그 어느 곳에서도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바꿔 말하면, 그 어느 곳에서든 내 두 발로 걸을 수 있고, 내 몸을 움직일 수 있고, 내 두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으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딘가로 떠나는 것은 내 인생에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근처를 걷고 요가를 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무언가를 만들든 손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면 낯선 곳을 여행하는 것보다 더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행은 기회가 닿으면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새로운 곳에 갈 기회가 생기면 그 기회를 최대한 즐기면 그뿐이라고 생각했지, 일부러 시간을 내고 돈을 들이고 체력을 쏟아 여행을 떠나는 것에는 우선순위를 높이 두지 않았다.


20살 때, 29살 때 혼자 일주일간 해외여행을 갔었는데,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것을 보고 와야 한다는 것이 숙제처럼 느껴졌다. 20살 때는 혼자 여행을 해보고 싶어서 떠났고, 29살 때는 연휴에 직장인들이 미리 비행기표를 예매해 긴 여행을 떠나길래, 나도 그렇게 해봐야겠다 하고 떠났다.


완전히 새로운 나라에 가서 새로운 풍경과 관광지를 둘러보고, 새로운 음식을 먹었는데 생각보다 그렇게 감흥이 있지 않았다. 조상들이 남긴 문화유적이자 관광명소를 넋 나간 표정으로 앉아 지키는 현세의 사람들을 보고 비슷하게 내 마음도 시무룩해졌다.


당연히 너무나도 즐거웠던 여행도 있었다. 감흥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즐거운 여행도 있었고, 한 도시에 쭉 머물러 그곳에 정들 수 있는 시간이 있어서 좋았던 여행도 있었다.


나는 같은 시간에 다른 장소들을 가는 것보다는 다른 시간에 같은 장소를 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반복, 루틴, 일상, 그리고 여러 사람들과 좋아하는 한 장소에 가는 것, 다른 장소들을 함께 갈 한 사람, 그리고 가장 최고는 아마도 한 사람과 한 장소를 계속해서 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제주도 여행을 혼자 가서 바다 앞에 있는 유명한 한 카페의 어느 자리에 앉아 있었던 적이 있다. 한 가족이 다가와 내게 잠깐만 자리를 비켜줄 수 있냐고 했다. 매년 그 자리에서 아빠와 딸이 사진을 찍는다고 했다. 올해도 그 자리에서 잠시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로맨틱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매년 같은 장소에 와서 가족과 사진을 한 장씩 찍을 수 있는 삶이면 멋진 삶일 것 같았다. 한 장소에서 기억에 기억을 한 장씩 덧입히는 삶은 로맨틱한 삶일 것 같았다.


남자친구가 여행을 갔는데 갑자기 일상에서 느끼던 내 행복이 흐릿해졌다. 내 하루는 너무 소중하고, 평온한 일상이 곧 행복이어야 하는데, 애써 노력해서 ‘이것이 행복이야. ’라며 의식하고 붙잡으려 애써야 했다.


그가 잠시 없어져서는 아니었다. 할 일이 있었고, 그날그날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할 틈이 있었고, 아무 일 없이 쉴 시간은 더없이 소중했다. 그가 너무 보고, 당장 같이 하고 싶은 것을 못해서는 아니었다.


여행지의 사진과 그가 현지에서 먹은 음식 사진을 보내주는데, 기분이 안 좋았다. 가기 전에는 일상을 공유해 달라고 했었는데, 막상 공유받으니 그렇게 기쁘지도 않았다.


평소랑 똑같이 내게 비슷한 시간에 비슷한 정도의 관심을 보여주기만 기대하게 되었다. 그가 여행을 떠나, 우리가 아닌 그의 여행에 더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 섭섭하기만 했다.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여행에 집중하고, 잠깐의 시간은 나를 위해 떼어내 주기를 바랐다. 그의 일정과 사진을 잠깐씩 보내주는 것이 아니라, 여행 중에도 나와 집중해 대화할 시간을 조금 떼어내 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것은 기분이 안 좋은데 작은 이유나 핑계에 불과했다.


그냥 나는 그 경험을 같이 못한다는 것이 싫었다. 가족들이 여행을 떠나고 회사 사람들이 돌아가며 해외여행을 다녀와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남자친구가 나는 본 적이 없는 풍경을 보고 온다고 생각하니 싫었다.


행복은 늘 내 발 밑에 있어야 하는데, 그의 발 밑에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 같다. 평소에 나와 가장 많은 여가 시간을 함께 보내니, 그와 나의 행복이 고만고만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그가 일상에서 행복을 찾으니 좋다고 생각했는데, 행복하기 위해 그는 그만의 시간을 따로 떼어놓았구나 싶으니 질투심 아닌 질투심이 들었다.


나를 만나기 전에 세워놓은 계획이고, 가족과 함께 가는 여행이라 나에게 같이 가자고 했을 때 합류하지 않았는데, 막상 나와 그 경험을 나누지 않으니 싫었다.


여행을 할 시간과 돈, 친구, 가족, 독립심까지 모두 있지만,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고 생각해서 해외여행에 굳이 시간과 돈을 쓰지 않는데, 이 정도로 마음이 안 좋으면 그동안 스스로 합리화한 것인가 싶어지기까지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면 나도 행복해야 하는 것인데, 내 일상의 행복감마저 떨어지는 나 자신을 보니 뭔가가 결핍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적극적으로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구나 싶었다. 내 행복이 여행보다는 다른 곳에 있다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더 적극적으로 해야겠다 싶었다. 연애를 할 때 모든 것을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에 운동 말고는 혼자 하는 활동에 적극적이지 않았는데,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혼자서 할 시간을 더 많이 마련해야겠다 싶었다.


그는 내가 하는 일과 활동을 모두 지지해 줄텐데, 괜히 스스로 결핍시켰던 지점들이 결국 나를 그의 행복을 더 지지해주지 못하는 못난 사람으로 만들었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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