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평화를 선택하기로 결심했다
어느 여름날 연인으로부터 대화하다가 숨 막히고 가슴이 답답해진다는 말을 들었다. 대화와 언쟁 그 사이를 오가는 중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 듣는 말은 아니었다. 최신 연인이자 마지막이기를 꿈꾸는 그에게는 처음 듣는 말이었지만, 나로서는 예외적으로 초고속 이별을 택하지 않고 나름대로 진지하게 만났던 과거의 연인들로부터 들어봤던 말이었다.
이유도 명확히 알았다. 상대에게 집착하는 것은 한참 전에 내려놓았지만 집요함은 내려놓지 못했다. 어쩌면 그것도 집착의 일종이었다. 그에게 집착했다기보다는 내 기준에 집착했다. 그리고 그것이 상대방을 숨 막히게 했다.
세상 까다롭고 예민하고, 시시각각 변하는 기분에 따라 말과 행동은 더 큰 진폭으로 변하는 나에게 끝까지 인내심을 발휘하고,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평정심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는 연인이 내 기준에 맞지 않다고 여겼다.
나는 욱해도 욱하는 사람은 정말 싫었다. 그래서 이상형 1순위가 술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고 공동 1순위가 마음이 호수처럼 잔잔한 사람이었다.
오래 만났던 전연인은 딱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그도 내게 언젠가 내가 마음에 자꾸 돌을 던진다고 했다. 자신은 마음이 호수처럼 잔잔한데, 내가 돌을 던지니까 파동이 생긴다고 했다.
지금의 연인은 나처럼 욱한다. 대체로 차분하지만 화가 나면 화를 낸다. 나도, 그도 기질적으로 욱하지만 나이도 먹을 만큼 먹고, 경험도 쌓일 만큼 쌓여서 욱하고 올라오는 것을 잠시 차분히 앉아 바라볼 줄은 안다. 그래도 끝끝내 풀리지 않는 화는 결국 상대방에게 어떻게든 전달하고서야 마음이 다시 잔잔해진다.
내가 돌을 던져도 파장이 일렁이다가 이내 고요한 호수처럼 잔잔해지는 사람을 원했지만,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 연애도 완전히 뜻대로 될 일은 없었다.
술을 못 마시는 건 좋은데 욱하는 것은 싫은데… 화내는 것이 너무 싫어서 생각이 많아질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가 좋았다. 그리고 오래 함께하고 싶을 만큼 충분히 좋은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상대방을 바꾸려고 하는 마음은 도리어 내 마음만 어지럽게 휘저어 놓는다.
연인이 내게 화내는 것이 싫다면 먼저 내가 그를 화나게 하지 않는 것으로 스스로를 바꿔보기로 했다.
전과는 접근방식도 바꿨다. 전에는 예민도를 낮추기 위해 정신과 약물을 복용해보기도 했고, 햇볕 쬐고 걷고 글 쓰고 요가하는 것으로 근본적으로 더 행복하고 자족하는 사람이 되려고 했다.
여러 가지 부작용으로 정신과 약물은 복용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스트레스 낮추기 위해서만 노력할 것이 아니라 연인과 함께할 때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을 조절하는 것에 애쓰기로 했다.
또한 내 태생적 특성인 감각적인 민감성과 감각 과부하로 인한 스트레스, 그로 인한 예민함, 그리고 호르몬 변화에 따른 감정기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즉, 신경이 곤두서는 예민한 상태가 되거나 감정기복이 느껴질 때, 기분을 좋게 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기분 자체는 온전히 인지하려고 애쓰되, 그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대신 말과 행동의 변화의 강도를 낮추는 것이다.
감정기복의 생길 때 이렇게 반응할 때의 흐름을 나타내면 이렇다.
기분이 나쁘다 혹은 신경이 예민하다 — 왜 그런 것일까 — 감각과부하 때문에 그렇다 혹은 상대방의 말 때문에 그렇다 — 감각과부하 때문이라면 일단 편안한 환경으로 최대한 바꾸도록 하고 그동안은 반응을 줄인다, 연인의 말 때문이라면 그 말이 왜 기분이 나쁜 것일까 생각한다 — 당장 답이 떠오르지 않아도 일단은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스스로 있는 그대로 최대한 받아들인다 — 머릿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되, 말과 행동의 변화는 줄인다 — 그 결과 내 행동 변화로 인한 상대방의 부정적인 반응이 내게 오지 않는다 — 시간이 지나면 긍정적인 자극이 오고 기분이 좋아진다 - 기분이 좋아지니 부정적인 자극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희미해진다 — 기분이 안 좋은 순간도 있었지만 연인과 싸우지 않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생각에 전반적으로 더 큰 행복감이 느껴진다 — 스스로에게 만족감을 느끼는 상태가 된다
전에는 감각과부하나 상대방의 언행으로 인해 불쾌감이 올라올 때, 부정적인 말과 급격한 행동 변화로 감정을 표출했다면, 불쾌감을 느끼고 그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이되, 반응의 강도를 낮춘 것만으로도 갈등과 갈등으로 인한 더 큰 스트레스를 막을 수 있었다.
명상과 알아차림은 근본적으로 같은 말인데, 화가 날 때 감정을 알아차리고 차분하게 대응하는 SBNRR(Stop-Breathe-Notice-Reflect-Respond)이라는 기법도 있다. 일단 잠시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고, 감정과 신체변화를 인지하고, 분석적으로 반추한 후, 반응하는 기법이다. 연인과 데이트를 하면서 사소한 것으로 화가 나거나 감정 기복이 느껴지는 순간이 오면, SBNRR 까지는 아니더라도 스스로에게 익숙한 감정과 행동 사이의 연결 고리를 잠시 멈추고 나의 상태를 알아차린(Stop & Notice) 후 부드럽게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모든 문제에 대응할 때, 그리고 행동을 바꾸기로 결심할 때 그 목적의식이 가장 중요하다.
연인과 또 한 번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아주 사소한 것으로 서로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며 꽤나 큰 갈등을 빚어낸 이후로 싸우지 않기로 결심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평소에 마음에 없던 독한 말을 주고받지 않기로 했다.
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처할 때 책을 읽듯, 연인과 싸운 다음 날에도 밀리의 서재에서 그 문제에 대처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두 권의 책을 읽었다. 엠마 햅번의 “감정의 이해”라는 책과 리차드 칼슨의 “사소한 것들로 하는 사랑이었다”라는 책이었다.
“감정의 이해”라는 책을 통해서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수용하는 것의 중요성과 감정이 하늘에 떠있는 구름처럼 나도 모르게 찾아오고 기다리면 지나가는 것이라는 관점을 배웠다. “사소한 것들로 하는 사랑이었다”라는 책을 통해서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항상 평화를 선택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연인의 불완전함을 감싸 안아주는 것의 의미, 잠깐 기분 나빠지는 자극에 반응하지 않기로 선택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관계의 이점에 대해 그동안 읽었던 어느 책보다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결혼하면 무조건 이 책을 사서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두겠다고 다짐했다.
그동안 다른 것은 몰라도 연애를 좀 더 길게 하기 위해 예민도를 줄여야겠다고 다짐하고 실천한 적은 있었는데, 의식적으로 관계에서 평화를 선택해야겠다고 결심했던 적은 없었다.
나에게 맞춰주는 사람을 만나려고 했거나, 그가 내게 맞춰주지 않아도 그 사람을 위해 내가 달라질 만큼 누군가에게 확신을 느끼고 간절했던 적이 없었다.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을 내 의지로 선택해서 만나고 보니 달라지고 싶어졌다. 상대의 마음에 돌을 그만 던지고 싶어졌다. 혹여라도 상대가 내 마음에 돌을 던지더라도 서로 돌을 던지기보다 조금 일렁이다가 이내 잠잠해지고 싶어졌다.
그래서 기존에 기분이 나빠지면 쓰던 고도의 회피전략과 마음의 정중앙에 큰 돌 투하하기 전략대신 사소한 일에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사소하게 반응하는 연습을 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