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의 난 내성적이고 숫기가 없었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아 조용한 편이었고 단짝 친구들 앞에서만 장난스러운 모습이 튀어나왔다.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전, 그 천혜의 황금 같은 시간에 소수의 친구들과 비밀 우정 다이어리 쓰기, 공기 놀이, 소꿉 놀이를 하며 소소하게 놀았다. 반신욕을 하는 온순한 카피바라처럼 깊고 좁은 울타리 안의 평온을 조용히 즐기는 게 좋았다.
출석 번호로 반 아이들을 이름 순으로 줄세우면 내 앞 번호인 친구랑 계속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이름에 ㅇ자가 2번이나 들어갔던 것도 같다. 나랑 정반대의 성향인 외향적인 그 아이는 쾌활하면서도 친화력이 좋았다. 당시 유행이었던 얼짱 스타일을 따라하는 샤기컷 무리와 같이 몰려다니면서도 일진 짓을 하지 않았고 공부도 놓지 않았다. 여자든 남자든 성별을 가리지 않고 인기가 많은 것은 당연했다. 난 그 아이의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오면 남몰래 활력을 얻곤 했다. 친해지고 싶었지만 노는 무리가 많이 달랐다. 난 출석번호 순대로 줄을 설 때마다 몇 마디 말을 나누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내 눈은 그 아이를 자주 쫓았고, 그 아이의 웃는 얼굴을 곧잘 담았다.
그 아이와 연결된 기억은 그 아이가 수련회에서 장기자랑으로 춤을 췄던 노래, 슈퍼주니어의 miracle이다.
너를 처음 본 순간 (처음 본 순간) a miracle (a miracle) 난 느꼈죠 기적은 바로 너란 걸 - life couldnt get better (hey) 난 널 품에 안고 날아 푸른 달을 향해 날아 (ho) 잠든 너의 입 맞출꺼야 life couldnt get better (hey) 너의 맘의 문을 열어줘 그대 내 손을 잡아요 life couldnt get better -
핸드폰도 없고 컴퓨터도 할 줄 몰랐던 난 춤과 노래, 음악에 대해서 무지했다. 제대로 들어본 적도 없으니 호불호를 생각해봤을 리 만무했다. 그 아이가 춤을 추는 무대 밑으로 학생들 모두가 우르르 몰려가 한마음으로 떼창을 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자유로움 속 흥분의 물결이 넘실거렸다. 처음 듣는 노래인데도 가사가 가슴에 꽂혀 한 줄씩 새겨졌다.
함성으로 들어 찼던 주변은 어느새 고요해졌다. 그 아이와 나, 음악만 존재했다. 내 눈은 그 아이가 추는 춤사위를 초고속 카메라로 찍는 것처럼 세밀한 프레임 속 수많은 순간들을 담아냈다. 이 기억은 내가 처음 '음악'을 인지하고 그 세계에 첫 발을 들인, 기적 같은 순간으로 남아있다.
일상으로 복귀한 후에도 난 노래를 들으며 느낀 전율을 잊지 못했다. 강렬하게 남은 머릿속 기억에만 의존해 당시 몰랐던 가수 이름과 곡 제목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빈 종이에 가사를 생각나는 대로 수없이 썼고 시도때도 없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어렴풋해지는 리듬과 멜로디를 붙잡으려 했다. 그 아이에게 그때 정말 멋있었다고, 가수가 누군지 곡 제목을 물어보며 친해질 수도 있었지만 뭔가 부끄러웠다. 새끼 강아지가 태어나자마자 어미의 젖을 무의식적으로 찾는것처럼 본능적으로 이끌리지만 무엇에 이렇게 갈증을 느끼는 건지 스스로도 몰랐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가사를 기억나는 대로 적은 탓에 인터넷에 검색해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겨우 찾아냈을 땐 또다른 감격을 맛보았다. 전자사전에 mp3 파일을 넣고 질릴 때까지 반복 재생을 하며 듣고 또 들었다. 새로운 세계의 행복에 젖어 충만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지금도 이 노래를 들으면 그때의 설렘이 되살아난다. '푸른 달을 향해 나는' 노래 속 화자처럼 내 몸도 두둥실 떠오르는 것 같다. 반짝반짝 빛났던 그 아이도 내 기억 속에서 아직까지 살아 숨쉬고 있다.
음악의 세계는 곡 제목과 같이 기적처럼 다가왔다. 그래서 내겐 곡 제목이나 가사에 대한 희미한 믿음이 있다. 내가 처한 상황에 맞춰 노래를 선곡하면 곡 제목, 가사대로 흘러갈 것이라는 믿음이다. 숨을 몰아쉴 정도로 벅차고 힘든 날은 아이유의 someday로 마음을 달랬고 하루를 살아갈 동력이 필요할 땐 Sam Ryder의 Tiny Riot를 들으며 전투력을 얻었다.
카페, 길거리, 유튜브 파도 타기 등 리듬에 이끌려 우연히 만난 노래는 가사를 먼저 찾아 꼼꼼히 훑으며 곱씹는다. 마음에 쏙 드는 가사라면 내 노래 재생 목록 갈피에 고이 저장된다. 케이팝, 힙합, 드라마 ost, 팝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꽂히는 노래를 수집하는 내게 갈피 속 노래들은 고전 명곡이나 다름없다. 나만의 명곡들은 색색깔의 시간과 추억이 덧입혀져 내 일부를 구성한다. 이름도 명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바람에 살랑대며 나부끼던 단발머리의 그 아이가 선사한 찬란한 세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