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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셋 Nov 18. 2019

 죄책감을 줄이는 방법

" 6만 원이, 뭐라고! "

  

 수험기간과 취업기간에서 가장 나를 갉아먹는 것 중에 하나는, '죄책감'이다.

 

 한 날은 모의고사를 치고 친구와 맥주 한잔 하자며 술을 마셨는데 반 잔도 마시지 않고 같이 친구와 훌쩍거리며 울었다. 분명 처음에는 "모의고사 잘 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더 열심히 해보자. " 였는데 끝에 가서는 부모님께 죄책감이 느껴진다며 울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수험기간도, 거기서 오는 불안감도 다 힘들었지만 가장 큰 부채감은 성인으로 내 할 몫을 해내고 있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남들은 부모님에게 보탬이 되지는 못해도 그래도 제 할 몫 하나는 하며 사는데, 난 아직도 지원받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 와중에 부모님은 나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 참 힘들었다. 


 내가 돈을 벌었다면, 아니하다 못해 시험에 합격에서 '학생'이라는 신분이라도 생겼다면 퇴직하고 여행도 다니고 악기도 배우며 '제2의 인생'을 열었을 텐데 말이다. 자식이 아무것도 신분이 없는 것과 어디 소속되어 있는 것의 안쓰러움과 걱정스러움의 무게는 엄청나니깐.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자식 때문에 몸이 힘들어도 다른 걸 하고 싶어도 나 때문에 미루는 것 같아 죄송하고 이런 자식을 둔 부모님이 안쓰러워서 고작 맥주 반 잔에 눈물을 훔쳤었다.


 

 취업을 준비하다 보면, 더군다나 사회에서 소속된 곳이 없어서 뒤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여기에 사회의 취업난이라며 생겨나는 신조어니 기사들이 눈에 마구 들어와서 죄책감을 더 가중시킨다.


 예전에 생겨난 학교를 졸업해서 자립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경제적으로 부모님에게 의존한다는 '캥거루족'이나, 일하지 않고 일할 의지도 없다는 청년층을 일컫는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  뜻을 지닌 '니트족' 같은 단어들이 그렇다.  


 여기에 고시낭인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공무원이 꿈이라는 사람들을 비난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20대와 30대가 너무 도전의식이 없단다. 현실에 안주하려고 하고 요즘 것들은 회사에 충성심도 없고 워라벨이니 뭐니를 지킨다고 칼퇴하고 조금만 힘들면 그만둔다고 한다.


 그렇게 도전의식이 없다고 하면서 동시에 적당히 자기 수준을 알아야 하는데 눈만 높다고 뭐라 하는 목소리도 있다. 중소기업 가서 뼈 빠지게 일할 생각은 안 하고 다들 눈만 높단다.


 취업을 준비하다 보니, 취업난을 걱정하면서 사회적 문제임을 어필하는 기사와 신조어들이 다 청년들을 비판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러니 죄책감은 더 생겨났다. 나도 다 컸는데 독립하고 싶지 않아서 캥거루처럼 사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나도 캥거루 주머니가 좁다."  갑갑하지만 못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알기는 안다. 내가 불안하고 후회하며 사는 것이 순전히 사회 탓 하기에는 내 문제가 차지하는 지분이 많다는 것을.


 아무리 힘들어도 취직하는 사람은 있지 않은가. 상대적으로 내 능력이 부족하고 연이은 실패로 인해 실제로도 무기력하고 '파워 열정'을 가지고 살고 있지 않은, 난 진짜 캥거루족 같았다. 부족하면 부족한 날 자꾸 채워나가야 하는 건 아는데,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니 말이다.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이 맞물리자, 내가 죄책감을 갖는 것 자체가 죄인인 것 같았다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자꾸 뛰라고 하고 뛰어야 하는 게 맞는 것은 아는데 계속 죄책감에 빠지니 뛰기는커녕 일어서는 것도 힘들었다.


 

  '러시아 전통인형인 마트료시카를 아는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생기는 죄책감이라는 게 마트료시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마트료시카는 유래는 까도 까도 나오는 행운을 바라는 전통인형이란다. 근데 까도 까도 나오는 게 죄책감이라면 말이 달라지지 않는가. 한 번 열면 안에 인형이 있고 있고 또 있는 것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 수 있는 게 죄책감이기 때문이다. '내가 왜 이걸 하기로 시작했지?' '나 왜 이것밖에 결과를 못 이루었지? '난 왜 남들만큼 못하지?' '난 왜 이렇게 무기력하지?' '난 왜 이렇게 작은 것도 못하지?'


 그렇게 내 죄책감의 마트료시카를 까고 까다보면 내 자존감은 아주 작은 마트료시카로 남는다. 근데 이 새끼손가락만 한 작은 자존감을 가지게 되다 보니 뭐든 시작하기 두렵다. 또 실패할까 봐. 후회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그럼에도 도전을 하지만 목표는 작아지고 의지가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이 마트료시카를 까고 까서 콩알만 한 인형이 되기 전에 멈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이게 말이 쉽지 그 방법을 몰랐다. 그러다가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작은 해결책을 난 두 번째 시험에서 실패하고 여행을 떠나 본 나이아가라에서 찾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계기는 6만 원이었다.


 내 수험생활에서 두 번째 시험이 끝났을 때 우울하던 나에게 언니가 여행을 가자고 말을 꺼냈었다. ‘뭘 잘했다고 여행을 갈까.’ 하는 죄책감도 들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무기력함도 들었지만 결국 대학 생활하면서 계속 모아둔 돈에 엄마와 아빠가 보태주는 돈을 모아 캐나다로 출발을 했었다. 비행시간도 힘들었고 무엇보다 마음이 너무 힘들었을 때라 도착하고 나서도 며칠간은 즐겁지도 않았다.


 언니와 나는 캐나다에서 퀘벡과 나이아가라가 가장 큰 목표였기에 나이아가라에서 하루를 머물기로 결정했었다. 이 때문에, 사전에 나이아가라가 아주 잘 보인다는 호텔에 예약을 했었다.


 그리고 당일 호텔에 가서 체크인을 하러 갔는데 직원이 "현재 당신들이 머물 수 있는 층이 6층으로 되어 있는데, 호텔에 23층 룸이 때마침 남아 있으니 추가 비용을 좀 내면 아주 좋은 방으로 바꿔드리겠다."라는 제안을 했었다.  


 당시에 나는 굳이 6만 원씩이나 내고 층을 바꿔야 하나 라는 생각을 했다. 가뜩이나 놀러 온 것도 마음이 편치 않았고 여행 기간은 아직 길게 남아 있었으며, 혹시라도 모자라게 되면 그 돈을 또 부모님에게 달라고 하기 싫었다. 그러나 언니가 결단 있게 추가 요금을 낼 테니 층수를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그 결정은 전적으로 옳았다. 23층에서 본 뷰는 말도 안 되게 좋았다.  혼블로어를 타고 나이아가라 밑으로 들어간 것과는 다른 느낌으로 황홀했다.

 

 그 날 새벽에 시차 적응도 아직 못하고 생각도 많았던 터라, 새벽 3시쯤 깨서 기다리다가 일출의 나이아가라를 보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죄책감의 마트료시카를 열어보느라 6만 원의 추가 요금도 내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이런 최고의 뷰를 바라보면서 새벽을 맞는 일도 어제의 일몰의 나이아가라도 볼 수 없었을 거라고.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죄책감 때문에 이 뷰를 놓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때의 로비 앞에 선 내가 정작 해야 할 것은 딱 하나였다.


 죄책감이 들더라도 그건 현재 6만 원을 지불하느냐 안 하느냐에 도움이 되는 것이 없었으니깐 말이다. 어차피 시험을 망쳤건 아니건 현재 로비 앞에 서있는 게 현실이고 그럼 죄책감은 짧게 가지고 앞으로의 경비를 따져서 카드로 충당할 것인지 아닌지를 정하기만 하면 되었다. 만약 언니가 없었더라면 난 죄책감의 마트료시카를 까는 데 사로잡혀 있느라 결국 추가 요금을 내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6층에서 보는 뷰에 만족했을지는 몰라도 반드시 후회했을 것이다.


 그 이후로 난, 약간 죄책감을 대하는 방법이 달라졌다. 여전히 난 죄책감에 흔들리고는 하지만 그럴 때마다 이 경험을 떠올렸다.


 생각해보면, 죄책감이 내 일생에서 실패에 일조한 것 밖에 없었다. 죄책감은 늘 후회를 낳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후회는 다시 또 하나의 죄책감이 되었다. 


 한 개씩 죄책감에 생각을 갖게 되면 그 죄책감의 마트료시카를 열어보느라 눈 앞에 정작 해결해야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게 되고 그럼 또 후회가 되고 그 후회는 다시 죄책감이 된다. 마치 그 날 로비 앞에 서있던 나처럼 말이다. 그래서 난 이 하등 도움되지 않는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나만의 대원칙을 세웠다.

 

 첫째, '죄책감은 되도록이면 짧게 하기.'


   죄책감의 시간을 짧게 하고 당장 내가 해야 하는 것을 생각하려고 하는 것이 '후회할 확률'의 퍼센트를 조금이라도 줄이는 방법이다.

 

 후회하는 부분이 적어지게 되니 혹여 실패를 하더라도 좀 더 빨리 일어서고 다른 방향으로 더 크게 볼 수 있는 시각이 생긴다.


 내가 세 번째 시험을 보고 내가 한 노력만큼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는 했어도 그래도 다른 길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여행 이후로 죄책감의 마트료시카를 끝까지 열어보려고 하지 않고 중간에 그만두려 하였고, 그래서 현재에 더 집중하여 후회를 줄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건 후회 속에 빠져있는 것보다는 나와 내 소중한 사람들에게 더 나은 길이다.


둘째,  ‘죄책감은 열심히 살았다는 것의 반증임’을 상기 하기.


  뿌리 깊은 죄책감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열심히 했다는 반증인 것 같다. 내가 만약 과거의 시간을 그저 놀고먹으며 보냈으면 애초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민할 정도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내가 과거에 한 모든 선택이 결국에는 실패였을지 몰라도, 그때의 나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고 올바른 방법이었다. 그래서 후회가 남고 죄책감도 생겨나는 것 같다.


 그만큼 당시에 최선을 다했으니깐. 그러니깐 죄책감을 느끼는 것 자체가 결과물이 어떠하던 나를 끝까지 몰아세울 정도로 부끄럽게 살지는 않았다는 증거임을 계속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두 가지 나름의 원칙이 있음에도 여전히 부족한 나는 종종 죄책감의 늪에 빠지고는 한다.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질 때도 있었다. 그래도 후회가 적으니 미련이 적었고 그래서 조금 더 빨리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니 수험기간이 길어져서 취직이 늦어져서 이직을 하고 있어서 그 외의 이유들로 죄책감을 느끼는 나 스스로와 사람들에게 이 작은 팁을 말하고 싶다. 죄책감을 느끼는 건 당신이 과거를 부끄럽게 살지 않았다는 증거이니 후회는 짧게 하자고. 


 난 종종 그 로비 앞에서의 경험을 생각하며 죄책감의 시간을 줄이고는 한다. 그때의 내가 했어야 하는 게 '내가 추가 요금을 더 낼 자격이 있을까.'가 아니라 '추가 요금이 내면 덜 후회할까 아닐까.' 였어야 했음을 말이다.


 아마 두 가지를 적용했다면, 후회를 줄이는 방법을 생각하며 다시 캐나다를 온다는 것은 힘들 수 있으니 나중에 돈을 더 아끼더라도 추가 요금을 내자는 결론을 냈을 것이고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내자, 6만 원이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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