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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seth Mar 16. 2022

스물일곱, 친구, 여름밤.

열심히 일한 자, 떠나라!

2020년 1월 1일. 나의 스물일곱이 시작되던 날, 나는 친구들과 일출을 보기 위해 산에 올랐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좁은 길이 사람들로 가득했다. 좀처럼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중간 지점보다 조금 더 올라갔을 때쯤 이미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친구들은 일출을 못 보더라도 정상까지 올라가자고 했고, 나는 그 인파를 뚫고 더 이상 갈 엄두가 나지 않아 그만 내려가겠다고 했다. 그렇게 혼자서 사람들이 없는 길을 찾아 내려가다가 해를 구경하기에 적당한 곳을 발견했다. 운이 좋았다. 나는 그곳에 혼자 자리를 잡고 앉아 밝아오는 하늘을 구경했다. 정상은 아니었지만, 아무도 없이 조용히 일출을 볼 수 있어서 오히려 좋았다. 모두가 가려고 하는 정상까지 굳이 올라갔다면, 이런 행운을 누리지 못했을 테다. 해가 다 뜨고, 밝은 아침을 혼자 맞으며 나는 그 자리에서 2020년의 다짐을 이런 글로 남겼다.


“포기가 뭐 어때서. 여기에서 만난 해도 해다. 정상만이 정상이 아니다. 나는 여기에서 충분히 만족스러운 아침을 맞았고, 모두가 간 길에는 일말의 미련도 없다. 오늘, 2020년의 첫 아침을 기억하자. 나는 나의 기준을 정하고 그것을 쫓는 사람이 되자. 타인의 목적지에 동요되지 말자. 올 해는 그거면 됐다.”


첫 아침의 다짐 덕분이었을까. 어쩌다 보니 들어서게 된 20대의 후반, 나의 스물일곱은 유독 즐거웠다. 의미 없는 정상에 부질없는 욕심을 내지 않으며 나에게 의미 있는 멋진 순간들을 많이 만들 수 있었다.   




그 해, 나의 즐겁고 멋진 순간들의 대부분은 라모와 함께한 시간들이었다. 내게 그녀가 있음이 어찌나 큰 행운인지. 침대를 가장 큰 행복으로 여기던 나는 라모에 의해 바깥으로 끄집어내 졌다. 라모의 덕에 나는 바깥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즐거움들을 경험했다. 페스티벌을 쫓아다니고, 맛집을 발굴해내고, 짧고 긴 여행을 다니며 우리는 거의 한 몸처럼 함께했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잖아. 옷깃만 스쳐도, 우린 느낄 수가 있어” 혹은 “야, 너두? 야, 나두!”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의 엄마들은 언젠가부터는 너 선셋이랑 놀지 마라, 너 라모랑 놀지 마라. 하곤 하셨다. 이제 둘이 노는 것은 그만하고, 남자와 데이트를 좀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아-그때의 우리는 연애를 못한 것인가, 안 한 것인가. 글쎄, 못했다고 하기엔 그때의 우리는 참 예뻤다. 그러니까 못했다고 할 수는 없다. 정말이지 그때는 둘이서 여기저기를 쏘다니는 데에 죽이 척척 맞는 바람에 외로울 새가 없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연애 공백은 그 이후로도 꽤 길었다. 이제 둘이서는 그만 놀고 싶어 졌을 때도 둘이서 놀아야 했다. 흠, 이렇게 쓰고 보니 큰 행운이라는 말은 취소해야겠다. 큰 행운은 말고 그냥 다행 정도로 하자. 내게 그녀가 있음이 어찌나 다행인지!



사장님의 최애 고깃집에서 기똥차게 맛있는 저녁을 먹고, 함덕 해수욕장을 걸으며 멋진 버스킹 공연을 잠시 보고, 간단한 안주거리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잠옷 차림을 한 채 우리에게만 열리는 별채의 와인바로 갔다. 한 참 내추럴 와인에 빠져있던 때였다. 그날 밤, 우리는 오렌지 와인에 도전했다. 아주 성공적인 맛이었다. 한 세계가 또 열렸다.

 

그 해 여름의 제주 여행은 내게는 여름휴가, 라모에게는 퇴사 여행이었다. 회색 일상으로부터 도망쳐 온 제주에서의 첫 밤은 완벽 그 자체였다. 우리는 창가에 앉아 한적한 밤 동네를 멍하니 보면서, 새로운 와인에 성공한 것에 기뻐하면서,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를 만끽하면서 흠뻑 행복해졌다. 아- 한정적인 자유가 주는 절실한 행복. 특별히 더 달콤한 그 행복을 알 수 있음은, 우리가 그만큼 일상을 열심히 살았다는 증명이다. 우리는 일상으로부터 도망쳐 환상의 섬의 여름을 가질 자격이 충분했다.  



두고 온 서로의 일상에 대해 얘기하다가, 나는 조금 울고 싶어졌다. 그 순간, 일상을 이야기하면서도 내가 행복하다는 사실이 너무 행복해서. 여름밤을 함께 즐길 한 몸 같은 친구가 있다는 게 너무 좋아서. 그러나 이 행복이 끝날 날이 정해져 있는 게 벌써 아쉬워서 울고 싶기도 했다. 매일을 오늘처럼 살 수는 없으니까. 현실 밖의 일들은 어째서 다 즐거운 걸까.


그래도 괜찮았다. 우리는 아직 이 여행의 첫째 날을 보내고 있을 뿐이니까! 아직도 기대되는 내일이 여러 날 남아 있었다. 아- 내일을 기대하는 게 얼마만의 일인지. 우리는 이 여행을 위한 건배를 하고, 마지막 잔을 비웠다. 그러고도 여행의 첫째 날을 이대로 마치기가 아쉬워, 밤 동네를 걸었다. 모든 것이 잠든 것처럼 조용한 밤이었다. 그 밤에 우리는 조금 멀리의 바다까지 걸었다. 까만 바다에 비친 불빛들을 예뻐라 하면서, 바닷소리만 잔잔한 고요 속에서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감사하다, 그치.

응, 진짜. 진짜 감사하다.

근데 여기엔 모기도 없냐 왜.

그니까. 여기선 시간도 천천히 가.

진짜. 여기 약간 천국이다. 그치.

응, 진짜. 나 여기에 살고 싶다. 정말.


약간 천국. 그래. 그 밤은 정말이지 약간 천국이었다. 영원히, 영원히 머물고 싶은 약간 천국.


하림 _ 떠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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