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마감일 - 당신의 마지막 말을 대신 써드려요

3화. 닫힌 창문 너머 - 우리의 이별 이야기

by 모해

3화. 닫힌 창문 너머 - 우리의 이별 이야기


-수연의 메모장


[사연 접수]

• 상대: 전 여자친구
• 요청: 4년 전 이별의 그날을 되돌이키고 싶음
• 이유:


수연은 이제 이유를 적을 차례였다. 수연은 조용히 메모장을 닫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기철은 천천히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5년 전쯤 갑자기 직장을 잃어서 실업자가 되었고, 몇 달 후에 어머니가 뇌경색으로 쓰러지셨어요.

병원과 집을 오가며 저와 아버지가 번갈아 어머니를 간병을 했습니다.

어머니에게 긴 기간 동안 간병인이 필요한 상황이었어요.

여자친구에게 저는 편안한 미래를 그려줄 수 없었고, 부담만 주는 존재가 된 거죠.

직장도 미래도 없는 제가 그녀의 미래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오랫동안 고민했어요."


"저는 모든 것을 잃고 무너졌고, 희망이 없었죠. 여자친구는 그런 저를 감당하기엔 너무 어리고 순수했어요."


그의 문장 하나하나가 오래 묵은 먼지를 털어내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수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여자친구에게 솔직하게 사실을 말하시지 않으셨어요?"


기철은 잠시 망설인 후 대답했다.

"제 존재만으로도 여자친구는 버거웠을 시기예요. 더는 여자친구에게 짐을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런 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요."


수연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지금 이 사람이 말하는 이야기가, 내가 알던 '나의 기철'의 이야기와 정말 같은 걸까?


"그 시기엔 낮엔 어머니를 돌보고, 밤엔 자격증 시험공부를 하며 지냈어요. 저 혼자 모든 걸 감당하겠다고 괜찮은 척했지만, 사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무너졌습니다. 여자친구와 미래를 꿈꾸기에 당장 제가 해야 할 것들이 너무 벅찼어요."


이야기를 듣던 수연은 이마를 짚었다. 갑작스럽게 왼쪽이마에서 쿡쿡 쑤시는 통증이 밀려왔다. 기철에게 이별을 통보받던 그날처럼 날카롭고 불쾌한 투통이었다.


수연은 말을 잇지 못한 채, 한참을 모니터 속 기철의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감정을 꾹꾹 눌러 담은 문장들 사이로, 문득 그의 단호했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


둘은 수연 집 앞 카페 창가에 마주 앉아 있었다.

기철은 내내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가 이별을 짧은 한마디로 꺼내기까지 긴 침묵이 흘렀고,
그 말을 내뱉은 뒤에도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수연은 당황한 채, 떨리는 손으로 테이블 너머 그의 손을 붙잡아보려 했다.
하지만 그는 수연을 외면하듯 조용히 손을 주머니 속으로 넣어버렸다.
그의 축 늘어진 어깨만큼이나, 그 손도 주머니 속에서 힘없이 웅크려 있었다.


수연은 눈물이 그득 고인 채로 한참이나 창밖만 응시하고 있었다.

창밖에는 핑크빛 벚꽃 잎이 마치 세상의 시간이 멈춘 듯,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흩날리고 있었다.

멈추지 않고 차오르던 수연의 눈물도 벚꽃잎과 함께 조용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수연의 슬픔을 외면한 듯,
세상은 잔인하리만큼 무심하게 아름다웠다.


--


이제는 그가 없는 세상이 익숙해졌는데, 그가 한 마디씩 말을 마칠 때마다, 아직도 가슴이 쿡쿡 아려왔다.

왜 그때의 나는, 그 사람의 마음이 다했다고만 단정 지어버렸을까.


수연은 긴 한숨을 내쉬며 기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급한 연락이 와서요. 내일 다시 연락드려도 괜찮을까요?"


기철은 잠시 후 짧게 답장을 보냈다.

"네, 괜찮습니다."


수연은 서둘러 둘러대고, 자리에서 일어나 두통약을 찾았다. 노트북을 덮고 눈을 감고 소파에 기대어 누웠다.

눈꺼풀 안쪽에 눈물이 가득 차였고, 오래전 그날의 기철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우리의 마지막 날,
그는 왜 그렇게도 담담했을까.
왜 나에게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모든 것을 나누고 공유하던 사이였다. 기철은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늘 자신의 하루와 일과를 수연에게 이야기해 주었고, 나는 그에게서 비밀을 느낀 적이 없었다.


내가 커피숍을 먼저 나선 뒤, 맞은편 길가에 서서 떠나는 기철을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며 서 있던 그 순간을 그는 아마 모를 것이다.

나는 이따금씩 퇴근 후 그의 집이 보이는 놀이터에 앉아 몇 시간씩 그의 방을 바라보곤 했다.


늦은 가을밤 혼자 앉아있던 놀이터의 벤치는 서러울 만큼 서늘했다.
이젠 더 이상, 자신의 재킷을 벗어 벤치 위에 깔아주던 기철도 곁에 없었다.

나는 코트 깃을 세운 채 그 자리에 앉아, 기철의 창문에 불이 꺼질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곤 했다.

그의 방엔 늦은 밤까지 불이 켜져 있었고, 창문은 그의 마음처럼 굳게 닫혀 있었다.


매일 그에게 조잘거리며 이야기하던 나의 일상은 멈춰버렸고, 나는 그의 닫힌 창문을 향해 아쉬움과 원망을 혼자서 속삭였다.

‘오늘도 별일 없었어. 너는… 괜찮아?’

대답이 돌아올 리 없는 혼잣말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매번 그 창문이 열리기를, 혹은 그가 창 너머로 나를 발견해 주기를, 조용히 바라고 또 바랐다.


재회를 코치 일을 하며 하나 분명히 알게 된 게 있다.
세상에 이유 없는 이별은 없다.
그리고 ‘사랑해서 떠난다’는 말은 결국, 이별을 말하는 사람이 스스로 죄책감을 덜기 위한 변명일 뿐이다.


이별에는 언제나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건 상대에게 말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스스로조차 모른 척하며 덮어둘 수는 없다.


기철도 그날, 그렇게 담담하게 등을 돌릴 수 있었던 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건 아마, 내가 그가 감당하기엔 벅찼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Capture.JPG



[ 수연의 Note : 사랑은 돌아올 수 있지만, 신뢰는 무너져서 그 자리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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