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네가 떠난 날, 내 시간도 멈췄다
의뢰인의 메시지는 밤늦게 도착했다. 띄어쓰기 하나 없이 이어진 문장과 급하게 눌러쓴 듯한 오타들. 그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의뢰인의 감정이 얼마나 엉망으로 흐트러져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저… 저 진짜, 지금 너무 후회돼요. 진짜 그런 말 하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나는 조용히 메시지를 읽고, 그녀에게 동의를 구한 뒤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저요… 저, 걔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냥, 너무 화가 나서… 3일이나 아무 연락 없으니까…”
그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렸다. 수연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봄비가 무심하게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감정을 정리하지 못한 말들이 허둥지둥 쏟아졌고, 울음 섞인 목소리 사이로 그녀의 후회가 들렸다.
“제가 진짜 싫어했던 건, 그 아이의 ‘회피’였어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너무 화가 나요. 너같이 답답한 남자는 정말 싫다고,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 심한 말들을 막 쏟아내면서 헤어지자고 했어요. 제가 …
그 사람은 늘 저한테 맞춰줬어요. 화내는 법도 모르고, 제가 못되게 굴어도 다 받아줬어요. 근데… 어느 순간부터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피하기만 했어요. 그게 더 싫더라고요.”
나는 이해한다는 듯 차분한 어투로 말했다.
“사랑이란 건, 서로 다른 언어와 방식으로 표현돼요. 특히나 갈등이 생기는 상황에서는 저마다 본인 고유의 성향이 더 잘 나타나죠. 고객분이 화가 나셨던 그 순간, 그 사람은 겁이 났고 조용히 물러섰던 것뿐이에요. 싸움이 반복되었었다면 상대분은 더욱더 그런 대화나 싸움이 두려웠겠죠.”
“저 이제 어쩌죠…”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더욱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수연은 의뢰인의 사연을 들으며 무의식적으로 노트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겨우 3일이라…. 이 이별은 소생할 수 있어.' 다시 이어질 수 있는 관계의 사연들을 들을 때마다 하는 수연의 습관이다. 서로 마음이 변하지 않았고, 오해를 돌이킬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다. 이 관계는 소생할 수 있다. 수연은 동그라미를 반복하는 바람에 동그라미가 점점 더 굵어졌다.
그 순간 수연의 노트북 화면에 새로운 메시지 수신 알림이 떴다.
발신인: 나기철
그 이름을 보는 순간, 그녀의 울음 섞인 하소연은 수연의 귀에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단 세 글자. 정중하고 간결한 인사. 의뢰인은 그렇게 정중하게 수연을 찾았다.
수연은 조용히 화면을 내려다보다, 혼잣말처럼 말했다.
'동명이인도 많잖아… 내가 아는 그 기철은, 이런 데 연락할 만큼 감성적인 사람이 아니야.'
그러나 수연의 마음속엔 이미 오래전 봉인된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수연은 무의식적으로 메시지를 열고 있었다.
"오래된 사랑을 찾고 싶습니다. 이미 4년이나 지났는데 가능할까요?"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수연의 눈앞에는 오래전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이미 몇 년이나 훌쩍 지나버린 수연의 사랑의 마감 속으로 그녀의 기억은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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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의 마음속에서 오래전 그녀의 시간들이 천천히 떠올랐다. 우리는 늘 함께였고, 그만큼 행복했다.
소소한 식사와 데이트, 늦은 밤 영화도, 벚꽃이 흩날리던 화사한 봄날도, 단풍이 노을빛으로 물들던 가을날도, 차가운 첫눈을 맞으며 두 손을 꼭 잡았던 겨울밤도, 모든 계절 속에서 우리는 함께였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기철이 직업을 잃었다. 회사 재정 상황이 악화되면서 아직 교육되지 않은 신입사원들을 대거 정리해고한 것이다. 부랴부랴 이직을 준비할 무렵 경기가 악화되었고, 아무 곳에서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기철은 점점 무기력해졌고, 좌절했다. 그는 자신을 믿고 응원하던 수연에게도 차갑고 거리감 있게 굴기 시작했다.
수연은 불안했다. 그에게 더 잘해주려고 노력했지만, 기철은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
밤마다 고민에 잠기던 기철은, 낮에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가끔 수연을 만날 때면, 웃음기 없는 의욕 없는 얼굴로 앉아만 있었다.
주머니 사정이 안 좋아진 탓에, 맛있는 음식도, 새로운 곳에 가는 데이트도 기철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했다. 그저 이따금 한 번씩 수연을 회사 앞에서 기다렸다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준 것이 그가 한 전부였다.
기철은 1년 가까이 무직 상태였다. 무슨 시험을 준비한다고 했지만, 수연은 자세히 묻지 않았다. 기철은 그것조차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3개월쯤 후였다. 기철은 어느 날, 카페에 마주 앉은 수연을 끝내 바라보지 못한 채 조용히 말했다.
"우리… 헤어지자.”
수연은 기철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미웠다. 그러나 보채지도 않았다.
둘은 기철의 축 처진 어깨만큼이나 무기력하게 헤어짐을 받아들였고, 그 이후로 어떤 연락도 서로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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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로 수연은, 기철의 이름을 다시 마주하게 될 줄 몰랐다.
그녀는 잠시 노트북 화면을 응시한 채 멈춰 있었다. 이야기를 계속 들어줄 것인지, 의뢰를 거절할 것인지 수연은 잠시 고민했다.
떨리는 손끝으로 다시 자판 위에 손을 얹고, 의뢰인에게 조심스레 메시지를 입력했다.
그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4년이라… 사실 쉽지 않은 시간입니다. 그런데도 의뢰하시고 싶으신가요?"
"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요."
그는 짧게 답했다. 감정을 털어놓듯 장황하게 사연을 설명하던 다른 의뢰인들과는 달랐다. 오히려 무언가를 감추려는 듯, 차분했고 조심스러웠다.
수연은 그 메시지를 몇 번이고 읽었다.
'4년이란 긴 시간을 보내고 지금에 와서야 이야기를 하겠다니…' 수연도 그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단단해졌고, 매일 이별과 재회 이야기를 겪으며 어떤 이야기에도 감정 소모를 많이 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 일단 들어나 보자.'
수연은 잠시 멈췄다가, 다시 물었다.
"지금 그분은… 연락이 닿을 수 있는 분인가요?"
"아니요. 그 후로 모든 연락이 끊겼습니다. 저의 시간은 거기서 멈췄어요. 저의 시간은 멈췄으나, 한순간도 그녀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순간, 수연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멈춰진 시간이라… 누군가에게는 멈춰진 시간이, 상대방에게는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가득한 고통과 상실감으로 채워졌었겠지.'
"그럼 어떻게 메시지를 전달하실 생각이신가요?"
"그게… 제가 전문가분께 문의드리고 싶었던 부분입니다."
수연은 키보드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답장을 입력했다.
"마음은 이해가 됩니다만, 제 입장에서 도움드리기 막막한 부분들이 많습니다.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고 진행 여부를 정하죠."
한숨을 내쉰 수연은, 이어서 다시 물었다.
"4년 전 그날 이야기부터 해주시겠어요?"
긴 시간 동안 봉인되었던 기철의 4년 전 이야기의 문이, 천천히 열리려 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알고 싶었지만 가늠조차 할 수 없었던 진실이, 4년 만에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려 하고 있었다.
[사랑은 감정으로 시작되지만, 행동으로 지켜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