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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해랑 Oct 30. 2023

부루마블이 인생게임인 이유

아들 부루마블에서 인생을 배우다

‘아 또 시작이다 주말은 좀 쉬고 싶다’ 이런  속마음은 모른 채 며칠째 내내 부루마블을 하자고 노래를 부르는 원이다(중학생 아들 가명이다). 핸드폰게임을 훨씬 좋아하지만 가끔 이렇게 같이 보드게임도 하는데 그중 부루마블을 가장 애정한다. 인생역전게임이라나 참나. 사실 식구 3명이서 하기엔 게임 시간이 너무 길어서 허리도 아프고 엉덩이도 없어지는 기분이라 은근히 힘든 게임이다. 계속 이 핑계 저 핑계로 미루고 미루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같이 놀자 하는 것도 한때지 싶어 일요일 몇 판을 함께 했다. 드디어 시작됐고 아빠들은 봐주는 거 절대 없다. 첫 판부터 빛의 속도로 아들을 파산시킨 아빠는 얄밉게 껄껄댔다. 아이는 혼자 식식대며 억울해했다. 그렇게 따지면 진즉 파산해 버린 나는 대성통곡을 해야 맞다. 2등씩이나 했으면서 그놈의 못 말리는 승부욕을 못 이기고 저런다. 올림픽으로 치면 은메달인 건데 그게 그렇게 분통할 일인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시종 쿨하고 의연한 매너를 잃지 않던 꼴찌 엄마는 은메달을 쥐고 분해하는 아들에게 단맛이 있으면 쓴맛도 있는 법이라며 살살 달래어 다음 판을 시작하게 만든다.



출처: 픽사베이

다음번도 애매한 2등 하더니 막판은 압도적으로 원이가 이기고 있었다. 사실 나는 게임 자체에 진심이 아니기에 이겨도 그만 져도 그다지 속상하지 않은데 원이는 늘 진심이고 승부욕도 세서 어릴 땐 게임으로 많이 속상해하고 화내고 감정 조절을 잘하지 못해서 혼도 나고 결국 판 뒤집어엎고 끝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번은 제발 이겨서 기분 좋게 끝내고 싶은 마음뿐이다.

암튼 중반쯤부터 아빠가 급격히 돈을 잃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놀리기도 하며 드디어 이 대장정을 끝낼 수 있구나 생각하며 신나게 하는데 자꾸만 잃는 아빠가 아들눈에는 무척이나 마음이 쓰이고 안쓰러웠나 보다. 사실 남편은 게임시간이 너무 길어서 되도록 빨리 파산하고 끝내고 싶은 마음이 내심 있었을 텐데 그 속을 모르고 말이다. 막바지를 향해갈 무렵 원이는 아빠가 자기 땅에 걸리면 자꾸 50% 깎아주거나 있는 돈 탈탈 털어 지불하면 받기 미안해하며 눈이 자꾸 촉촉해진다. '아니 부루마블 게임이 이렇게 막 깎아주고 그래도 되는 건가 인생역전게임이면 막 파산시키고 그래야 되는 거 아닌가' 싶어서

“게임은 그러는 거 아니야. 정정당당하고 공정하게 하는 거야”라고 이야기했지만 아이 표정이 꼭 잘 먹던 사탕을 갑자기 빼앗긴 것마냥 진심이다. 심지어는 내내 꼴찌만 하다 이제 겨우 드디어 은메달을 눈앞에 둔 나에게 귓속말로 ”아빠 조금 할인해 줘 엄마“ 라며 슈렉의 고양이 눈을 하고는 울멍울멍 최대한 가여운 표정으로 쳐다본다. 내가 파산할 땐 세상 얄밉게 웃었던 아들 아닌가 이건 무슨 상황인가 싶어 게임에 진심 없지만 진심을 가득 담아버린 엄마다.

”게임에 그런 게 어디 있어? 인생도 살아봐 봐주는 거 절대 없어 이건 인생 수업이야 “라고 질러버렸다.

몇 초의 정적이 흐른 뒤 아들이 울분에 차서 외친다

엄마가 나한테는 잘 살고 잘 나갈수록 사람이 겸손해야 되고 주변에 베풀어야 된다면서 아빠한테는 왜 그러는데 내가 괜찮다잖아
 

아니 엄마가 수십수백권의 육아서를 읽고 끄집어낸 아주 고급지게 한 주옥같은 인생 지침인 이야기를 여기서 이렇게 써먹는다고 싶어 아주 잠깐 멍 했다. 이상한 게 또 이 상황에서 맞는 말인 것도 같고 긴가 민가 하다 결국 아빠의 파산으로 끝이 났다. 게임이 끝난 해방과 후련함으로 만세를 외치고 벌떡 일어나려는 순간 아들표정이 못내 어둡다. 좀 전에 졌다고 식식대던 승부욕대장은 온데간데없고 세상 미안해하며 슬픈 표정으로 아빠를 보는 아들이 앉아있다. 잇몸만개하며 웃던 내 입은 살포시 다물어지며 이 순간 난 피도 눈물도 없는 악덕 건물주가 되어있었다. 눈 꼴 시럽게 세상에 아빠랑 둘만 남은 거 마냥 부둥켜안고 얼굴 보며 쓰다듬고 아주 신파를 찍고 있다.

게임이지만 자꾸만 돈을 잃는 아빠 모습이 속상하면서 아이 마음 한편이 불편했나 보다. 게임만 하면 어떻게든 이기고 싶어 하던 승부욕 많은 아이였는데 이렇게 보니 많이 컸다 싶고 아빠한정이지만 다른 사람의 기분과 상황을 살펴볼 줄 아는구나 싶어 이만하면 참 잘 크고 있네 기특하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중에서야 궁금함을 참지 못한 내가 그때 왜 그런 거냐고 물어보니

“ 아빠가 자꾸 잃는데도 화도 안 내고 웃으면서 아쉬워만 하니 마음이 너무 아팠어. 게임이지만 아빠 도와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라고 한다. 게임 몇 판 했을 뿐인데 철부지인줄만 알았던 아이의 따뜻한 마음도 이렇게 발견하고 정말 한 편의 인생이 담긴듯한 희로애락을 다 느낀 진정한 인생게임을 한 것 같다.

 부루마블 게임은 인생을 경험해 보는 대신 엉덩이가 닳아 없어져도 괜찮은 부모라면, 이 게임을 감히 추천해 본다.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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