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다닌 은행을 퇴사했다.
“지점장님. 퇴사 승인 해주세요”
퇴사 신청서를 올린 지 일주일이 넘도록 승인을 안 눌러줘서 처리가 안되고 있다. 단 하루도 더 다니기 힘든데 말이다. 따라다니면서 요청하고 외근 나가시면 전화해서 부탁하고 아주 목을 매고 있는 상황이다. 버튼 하나 눌러주는 게 그리 힘든지 아주 사람 환장하게 한다. 퇴사를 앞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심정 이해될 것이다. 하루하루가 아주 더디게 간다. 승인까지 늦어지니 더 환장할 지경이다. 당장 유니폼을 벗어던지고 늦잠도 자보고 아이 유치원 보낼 때 손도 흔들어주고 싶은데 말이다.
대학 졸업을 한 달 앞둔 시점에 시중은행에 합격하고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과외 외에는 아르바이트 조차 해본 적 없는 사회 초짜였다. 그렇게 처음 은행 문을 열고 출근이 시작되었다. 시작부터 매우 혹독했다. 바로 윗 선배언니의 텃새에 밀려드는 손님에 미처 숙지하지 못한 업무와 전산까지. 그렇게 시작된 나의 사회생활은 내 20대와 30대 중반까지의 청춘을 다 보내게 되었다. 주말출근에 매일 야근을 했어도 퇴사한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일은 힘들고 업무는 밀려왔지만 동료들과 퇴근 후 마시는 맥주 한잔에 그날 하루의 힘들은 날릴 수 있었다. 같은 일을 하며 같은 고충을 겪는 동료들이었기에 누구보다 서로 잘 이해하고 공감했다. 오늘은 어떤 손님이 이랬다더라 팀장님이 어떻다더라 소위 험담을 신나게 할 수 있었고 그게 하루의 해소였다. 눈빛으로도 ‘다 안다. 밥은 먹고 일하냐 ‘ 이런 사소한 관심이 큰 힘이 되는 나날들이었다.
20대 중반에 시작된 나의 사회생활은 이렇게 흘러가고 있었으나 여기서 명예퇴직까지 하리란 나의 굳은 결심은 발령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연초 정기인사에 발령이 났다. 그 지점은 집과는 거리가 가까웠지만 줄줄이 퇴사자들이 속출했고 뼈를 갈아 일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악명이 높은 지점이었다.
“ 해랑아 그 지점 벌써 매년 한두 명씩 관둬서 벌써 3명 넘게 관뒀대. 다 너랑 비슷한 또래였어.”
“ 언니 거기 가면 진짜 힘들대요. 못 버틴다던데 어떡해요.” 이런저런 걱정과 우려를 며칠째 받고 있다.
‘ 다 사람 사는 곳이고 은행 12년 다니면서 내가 못 겪은 일이 어딨냐 뭘 그리 겁주고 그래’ 사실 내심 걱정이 되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 부딪혀봐야지.
드디어 첫 출근. 평소 다리지도 않는 유니폼을 아주 손날이 베이게 다려 입고 큰 숨부터 내뱉고 스마일 서비스 미소 장착하고 힘차게 문을 열었다.
. “안녕하세요 이번에 새로 발령받은 늘해랑입니다” 허공에 울려 퍼지는 나의 인사. 직원이 분명 10명이 넘는데 조용하다. 아니 싸늘하다.
‘나 투명인간인가? 목소리가 작았나? 오늘 오는 걸 모르나?’ 수많은 물음표가 머리에 떠다니고 어정쩡한 내 몸은 발바닥이 본드에 붙은 것처럼 붙박이가 되었다. 얼음땡을 해준 사람은 이번에 같이 발령받은 팀장님. “저희 왔어요” 그제야 돌아보는 눈들. 아무래도 12년 은행 생활에 큰 고비가 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