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리더맘 No.6] 부탁 말고, 기세좋게 협상하라

20년 차 마케터가 스스로를 '마케팅'하는 법

by Sunsh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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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엔 딱 내가 공부한 만큼만 일하겠노라 다짐했었다.

초·중·고 12년, 대학교 4년, 석사 2년. 도합 18년을 공부했으니, 딱 18년만 일하고 미련 없이 퇴사할 줄 알았다. 그런데 눈 떠보니 어느덧 20년 차다. 공부한 시간보다 일한 시간이 더 길어져 버렸다.

지난 20년은 4번의 이직과 함께한 모험이었다.

산업군을 넘나들었고, 한국 기업과 글로벌 기업을 오갔다.

공학 석사 출신 마케터라는 특이한 이력 덕분에 연구소와 본사를 모두 경험했다.

이 유목민 같은 생활이 내게 준 선물은 "다양한 사람을 읽는 눈"이었다.


나만의 생존 비법은 단순했다.

"무조건 그 사람의 장점을 1개 이상 찾는다."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은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나는 얼굴에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사람이라, 억지로라도 상대를 존경하지 않으면 금방 들키고 만다. 연차가 쌓일수록 아래 직원들은 귀신같이 리더의 속마음을 읽어내지 않던가. 100% 나를 숨길 순 없었지만, 그들을 인정하고 배우려는 노력은 꽤 유효한 생존 전략이었다.

하지만 임원이라는 높은 벽 앞에서는 '맞춰주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팀장의 애티튜드와 상무의 애티튜드가 달랐고, 상무와 CEO의 공기는 또 달랐다."그 사람은 그 자리감이 아니야." 간혹 들리는 이 잔인한 평가는 결국 '능력'이 아니라 그 자리에 걸맞은 '애티튜드'에서 판가름 났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상대를 존중하되 주도권을 놓지 않는 것. 단순히 '착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협상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리더를 넘어 임원으로 가는 갈림길이었다.


"부탁과 협상은 어떤 차이일까?""비굴함과 당당함은 어디서 갈리는 걸까?"

요즘 같은 위기 상황에서 매일 자문하는 질문이다. 회사 생활을 하며 뼈저리게 느낀 것이 있다. 남자들은 만나면 본능적으로 서열을 정리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위치에 맞는 '기세'를 부린다. 삶에서 체득된 정치의 기술이다. 반면, 나를 포함한 많은 여성 리더들은 그게 부족하다. 그저 '열심히 일만 한다'. 아니면 '열심히 맞춰주거나'. 일만 잘하면 언젠가 알아주겠지. 하지만 그건 순진한 생각이었다. '일 잘하는 실무자'는 될 수 있어도, '판을 흔드는 승부사'는 되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조직 개편과 팀 유지의 불확실성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나는 실험을 하기로 했다.

숨죽여 처분을 기다리는 대신, 나의 '기세'를 시험해 보기로.


시작은 내부였다.

회사 내 다양한 임원 중, 나의 가치를 알아볼 만한, 특히 글로벌 경험이 있는 두 분의 사업부장님을 타깃으로 삼았다. 내가 그저 팀장 자리를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당신들의 비즈니스에 어떤 이익을 줄 수 있는지"를 담은 제안서를 들고 찾아갔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들은 내 손을 잡아주었고, 힘을 실어주겠노라 약속했다.

'역시, 비굴한 부탁이 아니라 당당한 협상을 해야 해!'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이 성공은 또 다른 칼이 되어 돌아왔다. 나의 직속 상무님(이곳의 성골, 순혈주의자)께 이 협상 결과를 보고했을 때, 돌아온 대답은 싸늘했다.

"제안을 받아준 그 두 분... 다 우리 회사에서 '특이한 분들'이잖아."

"그들은 원할 수 있어도, 그게 회사 전체에 영향력을 줄 만한 메인스트림은 아니야."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글로벌 감각, 오픈 마인드, 혁신... 밖에서는 능력이라 불리는 것들이, 이 거대한 성골들의 성 안에서는 그저 '특이함'으로 치부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과 결이 다른 사람들의 성공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저 "쟤들은 우리랑 달라, 별종이야"라고 선을 긋고, 자신들의 성벽을 더 높이 쌓을 뿐.

참 가지가지 한다. 그 골수들의 처절한 자리 지킴이...

나는 내부 '협상'에는 성공했지만, 결국 '그들의 세상'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여기서 끝일까? 아니, 나의 장점은 하나에만 올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가능성의 실을 한 가닥 한 가닥씩 걸어놓고, 그 실이 팽팽히 당겨지기를 기다린다.

시야를 밖으로 돌렸다. 내가 갔을 때 가장 시너지가 날 곳. 나의 강약점을 분석하고, 가장 긍정적인 화학 작용이 일어날 '단 한 곳'을 타겟팅했다. 그리고 다시 제안서를 썼다. 내 경력이, 나의 경험이 그 회사의 비전을 실행하는 데 있어 어떻게 쓰일 수 있는지, '왜 나여야만 하는지'를 매칭했다.

이번에는 누구를 통하지 않았다.제일 높은 의사결정권자에게 직접 메일을 보냈다.

아주 정중하게, 하지만 아주 공식적이고 당당하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나는 마케팅 전문가다.

내가 내 자신조차 마케팅하지 못하면 내 상품은 어떻게 마케팅할 것인가?

그리고 그 누가 나를 전문가로 믿고 마케팅을 맡겨 주겠는가?


막상 저질러 놓고 보니, 막연했던 두려움은 사라지고 나에 대한 자부심과 확신이 차올랐다.

결과가 중요치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메일을 보내놓고 답이 언제 올지 나도 모르게 계속 메일함을 새로고침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부탁'이 아닌 '협상'을 시도해 본 것. 누군가의 처분을 기다리지 않고 내가 먼저 판을 흔들어 본 것. 그것만으로도 나는 기회가 없다면 기회를 만들어내는 '당당한 개척자'의 마인드를 얻었다.

이 정도면 결과와 상관없이, 꽤 남는 장사 아닌가?



� 여러분의 회사 생활은 어떠신가요?

혹시 저처럼 거절당할까 두려워 '협상' 대신 '부탁'을 하고 계시진 않나요?

"착한 사람" "알아주기를 바라는 사람" 보다는 "원하는 것을 얻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 오늘,

여러분이 회사에서 부려보고 싶은 나만의 '기세'는 무엇인지 댓글로 나눠주세요.

우리 서로의 당당한 반란(?)을 응원해 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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