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리더맘 No.7] 상무님 대신, 아들과 골프장

회사의 '숙제'가 아이와의 '데이트'가 된 사연

by Sunshine


주말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수시로 메일함을 확인했다. '답이 올까? 아니, 읽기는 하셨을까?'

수신확인을 걸어놓고 메일을 보냈더라면 이렇게 마냥 기다리지는 않았을텐데, 하지만 우리 회사는 “수신확인”을 걸고 메일을 보내면, 메일 수신자의 첫 화면이 “발신자가 수신확인을 요청했습니다. 수신확인 메세지를 송부하시겠습니까?” 라고 뜬다.

그 메시지 자체가 꽤나 실례일 것 같아서 일부러 수신확인을 걸지 않고 메일을 보냈다.


평일이 지나 주말에도 이 기다림은 이어졌다. 이대로 집에만 있다가는 정말 계속 핸드폰만 쳐다볼 것 같았다. 불안을 잠재우려면 몸을 움직여야 했다. 나는 익숙하게 골프 조인 어플을 켰다.

마침 용인 근처 골프장에 2명 자리가 비어 있었다.

분당에 산다는 건 이럴 때 참 좋다. 마음만 먹으면 30분 내에 도심을 벗어나 필드를 밟을 수 있으니까.

망설임 없이 '신청' 버튼을 눌렀다. 나와 함께할 파트너는 다름 아닌 나의 아들이다. 낯선 성인 두 분과 함께 쳐야 하는 '조인(Join)' 라운딩. 혹시라도 중학생 아이와 함께라는 사실에 상대방이 불편해할까 싶어, 나는 특이사항에 메모를 남겼다.

"엄마와 아들이 함께 조인 신청합니다. 아이가 중학생이지만 키가 180cm라 성인과 체격 조건이 동일합니다. 경기 진행에 전혀 무리 없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전송 완료. 금세 조인 신청이 수락되었고 우리는 함께 골프장으로 출발했다!


사실 내가 아이와 골프를 치기 시작한 건, 순전히 '살기 위한' 선택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회사 생활'과 '엄마 노릇' 그 어느 것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한 워킹맘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남성 문화 중심의 지금 회사에 입사를 하고 나니, 회사에서는 은근하지만 강력한 압박이 들어왔다.

"K팀장, 네트워킹 하려면 골프는 필수야. 언제까지 핑계 댈 거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 주말은 평일에 함께 하지 못한 오롯이 아이, 그리고 가족이 함께하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안 그래도 매일 엄마 언제와를 외치는 아이인데, 골프 연습을 하려면 평일에 퇴근 후에도 연습장에 가야하고 거기다가 주말에 최소 5시간씩 엄마가 라운딩하러 사라진다? 그건 아이와의 관계 단절을 선언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때 내 머릿속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스쳤다.

"피할 수 없다면, 판을 합치자." 내가 배워야 한다면, 아이도 같이 가르치면 되잖아?

남들은 미쳤다고 했다. 중학생한테 무슨 골프냐, 그 돈이면 학원을 더 보내라...

하지만 내 계산기는 다른 결과를 내놓았다


그렇게 우리는 '골프 입문 동기'가 되었다. 벌써 3년 전 일이다. 당시 아이는 내 어깨 남짓 오는 키였는데, 우리는 매주 주중에는 연습장에서 땀을 흘리고 주말에는 파3를 돌며 함께 채를 잡았다. 어느새 3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꼬마였던 녀석은 나를 내려다보는 180cm의 거구가 되었고, 우리는 나란히 구력 3년 차 골퍼가 되었다.

사실 아이가 운동 신경이 없는 편은 아닌데, 유독 축구나 농구처럼 사람들과 몸을 부딪히는 격렬한 운동을 싫어했다. 그런 아이에게 골프는 정말 찰떡같이 잘 맞는 운동이었다. "엄마, 골프는 신사의 스포츠잖아. 매너가 제일 중요하대."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오로지 나와의 싸움에 집중하는 그 '정적인 치열함'을 아이는 좋아했다.


무엇보다 골프가 우리 모자 관계에 가져다준 가장 큰 선물은 '관계의 역전'이었다.

필드 위에서는 내가 잔소리꾼 엄마가 아니라, '배우는 학생'이 된다.

성장 속도가 빠른 아이는 금세 나보다 실력이 좋아졌고, 샷이 엉망인 나에게 다가와 훈수를 둔다.

"엄마, 헤드업 하지 말라니까? 채를 툭 던져야지."

평소엔 엄마 말에 "알았어" 단답형으로 대답하던 녀석이, 필드 위에서는 나를 가르치며 은근한 우월감과 뿌듯함을 느낀다. 자존감이 채워진 아이의 얼굴은 순해지고 해맑은 아이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마법은 그 푸른 잔디 위를 걸을 때 일어난다. 카트를 타지 않고 나란히 페어웨이를 걷다 보면, 흙 냄새와 풀 냄새가 아이의 마음 빗장을 여는 모양이다. "엄마, 사실 어제 학교에서 짜증 나는 일이 있었는데..." 방 안에서는 절대 나오지 않던 학교 이야기, 친구와의 갈등, 속상했던 마음들이 술술 나온다. 18홀을 돌며 그 이야기를 들어주다 보면, 뾰족했던 사춘기의 반항심이 한풀 꺾이고 둥글어지는 게 눈에 보인다.

그래서 나는 과감히 내 주말 골프 비용을 ‘최고급 인성 학원비'이자 '사춘기 치료비'로 책정했다.

이것이야말로 워킹맘의 가심비 최고의 타임 매니지먼트가 아닌가?


아이는 어린이날 선물로, 숏게임이 잘 안된다며 파3 필드 강습을 원했다. 우리는 함께 파3 필드 강습을 받으며 실력을 키웠다. 프로님께 받은 피드백을 서로 체크해 주며, 우리는 운동 동지가 되어갔다.

봄 가을로 아이와 함께 필드에 3~4번정도 나간다.

아이가 좋아하는 식당을 찾고, 라운딩을 돌고 나면 그 식당에서 맛있게 식사를 한다.

아이는 라운딩을 가기 위해 새벽 4시 기상도 마다하지 않는다.

골프를 칠때 만큼은 우리는 대등한 관계다.


"어머니, 아드님이 피지컬이 좋아서 거리가 장난 아니네요!" 오늘 처음 만난 조인 동반자분들이 아이의 시원한 드라이버 샷을 보고 감탄한다. 녀석, 쑥스러운지 모자를 푹 눌러쓰면서도 입꼬리는 귀에 걸렸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나였다. 아이와 함께하는 이 시간이 좋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똬리를 튼 불안감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CEO에게 보낸 메일, 아직 오지 않은 답장... 그 초조함이 드라이버 끝까지 전해졌나 보다. 몸은 굳었고 어깨엔 잔뜩 힘이 들어갔다. '탁-' 소리와 함께 공은 야속하게도 숲으로, 벙커로 도망갔다.

평소 같으면 웃어넘겼을 텐데, 오늘은 유독 마음이 쓰렸다.

내 커리어도 저 공처럼 벙커에 빠진 건 아닐까? 내가 너무 무리한 샷을 날린 건 아닐까?

그때, 씩씩거리며 카트로 돌아오는 나를 보며 아들이 무심하게 한마디 툭 던진다.

"엄마, 왜 그렇게 힘을 줘? 그냥 툭 쳐. 안 죽어."

아들의 그 말이 정곡을 찔렀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플레이어인 내가 잔뜩 긴장해서 어깨가 굳어 있으면, 그 모습을 지켜보는 동반자(상대방)도 덩달아 불안해진다. 내가 불안하면, 나를 평가해야 하는 (회사 안에서의) 사람들도 나를 불안하게 볼 것이다.


마인드셋의 전환이 필요했다.

우선 여유를 가져야 한다.

급할수록 호흡을 고르고, 루틴 하나하나를 평소보다 훨씬 여유 있게 가져가야 임팩트가 정확해진다.

하지만 그 '여유'가 '대충'을 의미하는 건 결코 아니다.

겉으로는 물 흐르듯 부드러워 보이지만, 그 동작 하나하나에는 그 어떤 때보다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립을 잡는 손가락의 압력, 테이크백의 궤도, 하체의 지지... 각 동작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도록 치열하게 생각하고 움직여야 한다.

'겉으로는 여유롭게, 속으로는 치밀하게.'

그게 지금 커리어의 갈림길에 선 내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승부수를 띄운 지금의 시기에서 취해야 할 유일한 행동 지침이다.

골프는 참, 18홀을 돌 때마다 매번 인생의 자세를 새롭게 배운다.


그래, 이제 됐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다시 티박스에 섰다. 머리는 차갑게 식히고, 몸의 힘은 뺐지만, 눈빛만은 공을 뚫을 듯이 응시했다. '채앵-'

경쾌한 금속음과 함께 공이 파란 하늘을 가르며 날아갔다. 오늘 친 샷 중 가장 멀리, 그리고 가장 똑바로.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진인사대천명.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나서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말. 스윙은 내 손을 떠났고, 제안서도 내 손을 떠났다. 이제 결과는 바람에, 그리고 그분의 마음에 맡길 뿐이다.

"엄마, 굿 샷! 오늘 샷 중에 최고였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아들을 보며 웃어 보였다.


결과가 어찌 되든 상관없다.

나는 오늘 샷 감을 찾았고, 든든한 아들과 최고의 데이트를 마쳤으니까. 그거면 충분하다.


[� 여러분도 혹시 지금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리며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계신가요? 공은 이미 떠났습니다. 결과는 잠시 잊고, 이번 한 주는 저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맛있는 밥 한 끼 하며 마음의 힘을 '툭' 빼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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