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리더맘 No.8] 잔다르크 Vs. 마에스트로

나는 화형대 위의 잔다르크보다, 무대 위의 마에스트로가 되고 싶다

by Sunshine
루발리님과 인사를 나누고, 그의 시그니쳐를 직접 받을 수 있었다


회사 일이 유독 답답하게 꼬이던 날, 꽉 막힌 속을 풀고 싶어 오랜 친구를 만났다.

내 하소연을 한참 듣던 친구가 대뜸 나를 빤히 보며 말했다.

"너 변했어. 예전엔 잔다르크 같았던 너는 어디 간 거야?"

가슴 한구석이 찌릿했다. 친구의 말은 이어졌다.

"예전의 너는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뭐든 시도하고 들이받았잖아. 그런데 지금 네 이야기엔 '너'는 온데간데없고, 주변 상황 눈치 보는 얘기뿐이야. 그게 정말 행복해?"

친구의 걱정 어린 눈빛 앞에서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술잔만 만지작거렸다.

친구 눈에는 지금의 내가 현실과 타협해 자아를 잃어버린, 그저 그런 '적당한 직장인'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밤거리를 걸으며 친구의 질문이 계속 맴돌았다. '정말 내가 나를 잃어버린 걸까?'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고, "그저 그렇게 버티는 삶"이 싫어서 여기까지 온 나였다.

그런데 어느새 나도 모르게 현실에 순응하며 색깔을 잃어가고 있는 걸까? 서늘한 밤공기 속에 불안함이 스쳤다.


하지만 한참을 걷다 보니, 마음속 깊은 곳에서 다른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비겁해진 게 아니다. 나는 조금 더 '노련'해지고 있는 중이다.


실무자 시절의 나는 날 것 그대로의 신념을 무기처럼 휘둘렀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은 강하게 주장했고, 부딪혀서 쟁취해 냈다. 그게 능력인 줄 알았다. 하지만 조직의 허리를 지나 더 높은 곳을 바라보는 지금, 나는 깨닫는다. 나의 신념을 진짜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나를 드러내고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직 전체에 나를 '스며들게' 해야 한다는 것을.

나와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이제 모두 각자의 영역에서 전문가들이다. 그들에게 "내 말이 맞다"고 강변하는 건, 때론 상처가 되고 때론 눈엣가시가 되어 결국 나를 튕겨 나가게 만든다. 모난 돌이 정 맞듯이.

이제 내게 필요한 건 강제적인 덧칠이 아니다. 마치 물이 종이에 번지듯 그들의 생각 속에 내 의도가 시나브로 스며들게 하는 것. 억지로 끌고 가는 대신, 그들이 스스로 움직이고 싶게끔 판을 만드는 것. 그래서 결국 그들이 "이건 우리가 원해서 온 길이야"라고 확신하며 내가 원하는 목적지에 함께 도착하게 만드는 힘.

나는 그 '부드럽지만 강력한 장악력'을 배우는 중이었는데, 친구의 눈에는 그 치열한 인내의 과정이 그저 '줏대 없는 순응'으로 보였나 보다.


내 방식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던 찰나, 최근 다녀온 두 번의 오케스트라 공연이 내게 명확한 답을 주었다.

첫 번째는 산투 마티아스 루발리 & 런던 필하모니아의 공연이었다. 그들의 연주는 "소리의 여백마저 지휘하는 정교함" 그 자체였다. 보통의 오케스트라가 웅장한 볼륨으로 관객을 압도하려 할 때, 루발리는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 그는 소리를 극한까지 줄인 약음(Pianissimo)의 순간, 숨소리조차 멈추게 만드는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어냈다. 음악이 멈춘 찰나의 공간감(Space)과 그 침묵을 찢고 나오는 날카로운 현악기의 선율. 그 무대를 보며 나는 무릎을 쳤다.

"그래, 웅장한 고함보다 더 무서운 건, 완벽하게 통제된 침묵이구나."

예전의 나는 잔다르크처럼 큰 목소리를 내야만 내 뜻이 관철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상사 앞에서 침묵하고, 한발 물러서는 건 굴복이 아니다. 루발리처럼 가장 결정적인 순간, 가장 날카로운 내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전략적 여백'을 만드는 과정인 것이다.


두 번째 깨달음은 구스타보 두다멜 & LA 필하모닉의 무대였다. 그의 공연은 “테크닉을 압도하는 공감의 서사시”였다. 지휘자가 일방적으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지휘자의 손끝과 연주자의 호흡이 실시간으로 얽히며 무대 위 전원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살아 숨 쉬었다. 그 힘의 원천은 '배려'였다. 파트 하나하나와 눈을 맞추고, 그들의 소리를 기다려주고, 마침내 하나로 묶어내는 리더십. 공연이 끝난 후 일동 전체의 인사가 아니라, 파트별로 충분한 시간을 들여 감사를 전하던 그의 모습은 “이 음악의 주인공은 바로 당신들입니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나는 여기서 확신을 얻었다. 내 뜻을 이루기 위해 동료들의 마음을 읽어주고, 그들이 주인공이 되도록 기꺼이 무대를 내어주는 것. 내가 돋보이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타인에게 스며들 때, 비로소 내가 원하는 거대한 교향곡이 완성된다는 것을 말이다.


이제야 친구에게 제대로 된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여전히 뜨거운 ENFP야. 사람을 좋아하고, 가슴 뛰는 일을 사랑하는 내 본성은 그대로지. 하지만 예전엔 그 에너지를 잔다르크의 칼처럼 휘둘렀다면, 이제는 마에스트로의 지휘봉 끝에 담아내기로 했어."

앞뒤 안 가리고 칼을 휘두르다 화형대에서 장렬하게 산화하는 건, 20대 때나 멋있는 일이다. 우리는 살아야 한다. 그것도 아주 오래, 지속 가능하게.

조직이라는 거대한 오케스트라 안에서, 때로는 루발리처럼 숨 막히는 침묵으로 긴장감을 조율하고, 때로는 두다멜처럼 따뜻한 공감으로 사람들을 춤추게 만들어 결국엔 '내 악보'를 연주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내가 터득한, '나를 지우지 않으면서도 세상에 온전히 스며들어 내 뜻을 이루는 법'이다.


잔다르크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지만, 마에스트로는 연주가 끝난 뒤 단원들과 함께 박수를 받는다. 나는 오래오래 무대 위에 남아, 나만의 음악을 완성하고 싶다.


***혹시 여러분도 치열한 현실 앞에서 '내가 너무 변해버린 건 아닐까' 자책하고 계신가요? 그건 당신이 빛을 잃은 게 아니라, 더 깊고 넓어지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릅니다.

올 한 해 조직이라는 거대한 오케스트라 속에서, 나만의 소리를 잃지 않으려 애쓴 당신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우리는 비겁해진 게 아니라, 현명해지고 있는 중이니까요.

부디 오래오래, 지치지 않고 당신만의 교향곡을 완성하시기를.

우리의 2026년은

나를 믿는 든든함" + "조금의 뻔뻔함" = "대체 불가한 여유(Attitude)"를 갖는 그런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직장생활 #리더십 #워킹맘 #조직문화 #팀장 #커리어 #멘탈관리 #성장 #여성리더 #에세이

이전 08화[K-리더맘 No.7] 상무님 대신, 아들과 골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