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리더맘 No.9] 2025년을 보내며

유독 작아 보이는 나 그리고 당신에게

by Sunshine

부제: 마흔의 냉전 시대를 허둥지둥 건너는 우리들을 위하여


[프롤로그]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그리고 2025년의 끝자락에서 유독 작아지고 허둥지둥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과 이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올 한 해 내가 잘했던 일, 내가 얻은 성과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하지만 첫 줄부터 쓰기가 쉽지 않았다.


항상 연말 시상식의 주인공은 후반부에 시청률 터진 드라마의 주연 배우 몫이 아니던가.

하지만 내 2025년의 후반부는 '김 부장' 드라마의 현실판이었다.

회사에 불어닥친 희망퇴직과 사업 축소, 그 매서운 찬바람을 나와 내 주변 우리 모두가 정신없이 온몸으로 맞았던 기억이 앞선다.

이 조짐은 올해 초부터 있었다. 그래서 올해 나는 지금 현재 회사에서의 “힘 빼기”를 했던 것 같다.

여기서 어떻게든 버티고 더 나아가겠다는 생각보다는 솔직하게 현재 이 회사가 나의 지나가는 "과정" 중의 하나이지, 내가 끝까지 함께할 내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여기서 어떻게 잘 마무리할지, 나의 커리어 포트폴리오에 이 스토리를 어떻게 입힐지를 치열하게 고민했다.

틈틈이 어느 곳에서 어떻게 일할 것인지, 그리고 과연 “월급쟁이”의 생활을 지속하는 것이 맞는지 근본적인 질문도 던졌다.


그 준비를 한다고 나름 열심히 허둥지둥 움직였는데, 냉철하게 말하면 손에 잡히는 결과물은 없다.

모든 것이 '-ING(진행 중)' 일뿐.

솔직하게 이 부분이 연말의 지금 이 시점의 나를 작아지게 하는 부분이다.


그래도 2025년에 얻은 확실한 것들은 있다.


첫째, 그 많던 회식에 가지 않고 운동에 집중한 것이다.

덕분에 나는 10kg을 감량했고, 지방을 잃은 자리에 근육을 채웠다.


둘째, 브런치 작가를 신청해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구독자가 많은 것은 아니나, 꾸준히 라이킷을 눌러주시는 30여 명의 소중한 독자분들이 있어 감사할 따름이다.


세 번째는 "아이를 향한 신뢰"이다.

나는 늘 아이가 하고 싶은 게 없어 보여 걱정했고, 때론 아이에게 표현도 했다. 하지만 그건 나의 기우였다.

아이는 조용하지만 치열하게 스스로를 증명하고 있었다.

아이는 "수학만큼은 제대로 해내고 싶다"더니, 3년 연속 고려대학교 수학 경시대회에서 대상, 최우수상, 그리고 다시 대상을 거머쥐었다. 3년 내내 시상대에 오른 아이는 내게 덤덤하게 말했다.

"엄마, 나 이제 여기서 받을 수 있는 상은 다 타본 것 같아. 이제 다른 목표를 세울래."

아이는 내 걱정보다 훨씬 더 단단하게 자라고 있었다.

내가 해준 잔소리가 무색할 만큼, 아이는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성취하고, 심지어 그 성취를 넘어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법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이제 아이를 걱정하는 대신, 그저 믿고 지켜보는 법을 배웠다.

이것이 내가 올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이다.


가장 욕심 많은 나의 “커리어”에 대해서는 솔직히 모르겠다.

나름 열심히 준비한다고 했고, 항상 미리 대비하고 리스크 관리를 잘하는 것이 '나'라고 생각했는데 2025년을 마무리하는 지금 시점에서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아직 결정된 것도, 내 마음도 100% 확정된 것이 없다.

그 불안함을 달래려 나를 더 단련했던 것 같다.

운동 뿐만 아니라, 다시 감각 있는 B2B2C 마케터로 살기 위해 시간 날 때마다 공연도 보고, 갤러리도 가고, 점심시간엔 더현대를 방문했다. 뭐, 그게 나름의 즐거움이었지.


근무의 마지막 날 저녁, 나는 “알폰스 무하” 전시를 도슨트와 함께 예약했다.

솔직히 무하는 내게 매력적인 작가는 아니었다.

"나 아름다워요, 나 여성스러워요"라고 대놓고 외치는 느낌이랄까.

섣불리 나는 생각했다. 작품 속의 내러티브를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는 내 취향은 아니라고


하지만 도슨트의 설명을 듣고 보니, 알폰스 무하는 생각보다 굉장히 치밀한 마케터였다.

그는 스스로를 마케팅할 줄 알았다. 자신의 생각과 고집, 철학을 꾸준히 밀고 나갔다.


특히 전시장에서 본 <JOB> 담배 종이 광고 포스터가 기억에 남는다.

사람들은 그림 속 여인의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관능적인 아름다움에 열광했다.

하지만 그 화려함 뒤에는 무하의 치밀한 계산이 숨어 있었다.

여인의 뒤를 감싸고 있는 독특한 모자이크 패턴. 그것은 다름 아닌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슬라브 민족'의 전통 문양과 비잔틴 양식이었다.

가장 상업적이고 세속적인 '담배 종이' 광고 한복판에, 그는 아무도 모르게 조국의 영혼을 심어놓은 것이다. 광고주에게는 대중을 사로잡을 '아름다움'을 주고, 그 안에 자신만의 '정체성'을 은밀하게 녹여내는 것. 이것이 바로 무하가 가진 마케터로서의 현명함이었다.

알폰스 무하, (1896) - JOB 담배 종이 광고를 위한 석판화 포스터.


솔직히 말하면 올 한 해 나는 "나 이렇게 괜찮은 사람인데, 왜 사람들은 몰라줄까?"라는 생각에 갇혀 있었다. 15년간 일했던 나의 산업군에서 타 산업군으로 이직하여 일하는 그 4년동안 나를 계속 증명하는 일이, 그 억울함이 극에 달해 견디기 힘들었다. 그게 2025년 내 커리어와 삶이 힘들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무하처럼 조금은 현명하게, 시나브로 스며들듯 영향력을 확대하고 그 안에서 내 철학과 가치를 조금씩 노출하는 '지혜'가 내게는 부족했던 것 같다.


그의 작품 세계에서 나의 시선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그림은 바로 [백합의 성모] 이었다.

큰 명성과 부를 얻은 무하가 마침내 그려낸 그림.


솔직해지자면, 다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들이 있었다. 나는 40대 중반이 되면, 안정되고 화려한 날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챙겨야 할 것도, 눈치 봐야 할 것도 생각보다 너무 많았다. 이 틈에 끼이고 저 틈에 치여 살다 보니, 어느새 내 생각보다 훨씬 작아지고 불안해진 나를 발견했다. 사회적인 분위기가, 그리고 꽉 차버린 내 나이가 나를 더욱 초라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불안을 들키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썼다.

옷을 사고, 피부과를 가고... 자꾸만 무언가로 나를 화려하게 위장했다. 남들이 보기엔 '관리하는 여자'였겠지만, 실은 금이 간 내면을 가리기 위한 절박한 보수공사였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겉모습만 단단히 포장하던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짠 하고 나타나 나에게 큰 방패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이 거친 세상살이에서 나를 숨겨줄 튼튼한 집이 되어주거나, 비를 막아줄 지붕이 되어주기를. 내가 더 이상 애쓰지 않아도 되게, 나를 좀 구해주기를.

하지만 마흔 중반을 살아가며 뼈저리게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타인이 내 삶의 온전한 지붕이 되어주는 일은, 영화 속에서나 일어나는 기적이라는 것을.


그 헛헛한 마음으로 우연히 그림 한 점을 마주했다. 알폰스 무하의 [백합의 성모]였다.

그림 속에는 붉은색 슬라브 민족 전통 의상을 입은 한 소녀가 앉아 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있지만, 고개를 푹 숙인 모습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지쳐 보였다. 땅만 바라보는 그 모습이 꼭 지금의 나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렸다. *"나 좀 안아줘, 나 좀 숨겨줘"*라고 말하는 내 속마음 같아서.

그런데 가만히 그림을 응시하다가, 문득 가슴을 치는 것이 있었다.

소녀의 뒤에서 거대한 날개처럼 비바람을 막아주고 있는 저 존재. 무하는 고난받는 자신의 민족을 위로하기 위해, 소녀의 뒤에 민족의 영혼과 역사를 그려 넣었다고 했다.

알폰스 무하, <백합의 성모>(1905) - 고개를 떨군 소녀를 묵묵히 감싸 안은 성모 마리아. 고난받는 민족을 향한 무하의 깊은 연민과 위로가 담겨 있다.

그림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네가 찾던 우산은 멀리 있지 않아."

결국 나에게 그러한 우산이 되어줄 수 있는 건 타인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내가 그토록 작게만 느꼈던, 내가 믿지 못하고 확신이 없어 매일 밤 흔들렸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흔 중반까지 치열하게 살아낸 나 자신이었다.

소녀가 민족의 역사에 보호받고 있듯, 나의 등 뒤에는 내가 묵묵히 버텨온 지난 20년의 시간들이 거대한 산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화려하게 빛나던 시절도, 포기하고 싶을 만큼 고단했던 시간들도.

그 모든 시간은 사라진 게 아니라, 내 등 뒤에 층층이 쌓여 누구도 쉽게 넘볼 수 없는 '내공'이라는 우산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내가 약한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꽤 튼튼한 우산을 만들어 살고 있었던 거다.

나를 가장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그 모진 풍파를 온몸으로 통과해낸 '지금의 나'뿐이었다.

그래서 이제 밖에서 구원을 찾는 일은 그만두기로 했다.

불안할 때마다 옷을 사는 대신, 내 등 뒤를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때려치우고 싶을 만큼 힘들었지만, 기어이 도망가지 않고 살아낸 내가 꽤 괜찮은 '뒷배'가 되어주고 있으니까.

어쩌면 나를 지키는 가장 단단한 갑옷은 백화점에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살아온 시간 속에 있었나 보다.


그러니 나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너무 박하게 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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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며 느꼈던 제 마음의 풍경을, '나노 바나나(AI)'가 이렇게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려주었습니다.
​"나의 가장 든든한 뒷배, 결국 나 자신이었음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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