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리더맘 No.5] 공백과 여백

회사라는 "전쟁터"를 멋어나, 엄마라는 "안식처"로 퇴근합니다.

by Sunshine

​​지금 내가 다니는 회사는, 20년 경력 동안 거쳐온 곳 중 가장 보수적이고 가장 제조 기반이 강한 큰 조직이다.

​문화적으로는 숨이 턱 막힐 때도 있지만, 그래도 가장 큰 장점 하나를 꼽자면 바로 ‘칼퇴근’이다.


​오후 6시. 사무실의 공기를 뒤로하고 집으로 향하는 길, 나는 습관처럼 아이에게 전화를 건다.

​“아들, 오늘 저녁은 우리 뭐 먹을까?”

​우리 동네 분당의 장점은 아파트 단지 바로 앞에도 힙하고 맛있는 레스토랑이 즐비한 ‘카페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아이가 어릴 땐 상상도 못 했지만, 이제 중학교 1학년이 된 녀석은 내 퇴근 시간에 맞춰 먼저 식당에 가서 대기를 걸어두기도 한다. 가끔은 엄마와 마주 앉아 쿨하게 ‘치콜(치킨+콜라)’을 즐겨주는 데이트 상대가 되어주기도 한다.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생긴, 나름의 쏠쏠한 재미다.


​하지만 요즘은 겨울이라 그런지 아이가 몸살 기운도 있고 장염기도 보여 웬만하면 집밥을 해주려고 노력 중이다. 결국 모든 음식은 ‘신선한 재료’로 ‘갓 만든’ 것이 가장 맛있고 속도 편하니까.


​다행히 지하철역에서 집까지 오는 동선에는 대형 마트부터 생협, 초록마을까지 신선한 식재료를 구할 곳이 많다. 퇴근길, 5분 안에 휘리릭 해 먹을 수 있는 건강한 메뉴를 구상하며 장을 보는 것. 이것이 요즘 나의 소소한 즐거움이다.

​오늘 아침, 출근길 인스타그램에서 본 레시피 하나가 눈에 띄었다.

‘양배추 차돌박이 덮밥’.

​퇴근길에 양배추와 차돌박이, 그리고 내 취향인 가지를 하나 추가했다. 봉지를 달랑거리며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룰루랄라 가볍다.

​도어락 키를 삑, 삑, 삑, 누르는 소리가 나면 현관 저편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키 180cm, 덩치는 산만 한 중학생 아들이 둥실둥실 뛰어나오는 소리다.

아이는 현관에 들어선 나를 꽉 안아주고는 자연스럽게 내 가방을 받아 든다.

​“배고프지?”

“응, 엄마. 나 배 너무 고파. 오늘 저녁은 밥 많이 먹을래!”

​나는 옷을 갈아입고 손을 씻으며, 아이에게 자연스럽게 저녁 준비 ‘미션’을 부여한다.

​“아들, 프라이팬 큰 거 꺼내서 엄마가 사 온 차돌박이 먼저 구워줄래?”

​아이는 신이 나서 집게를 든다. 지글지글 고기 굽는 소리가 주방을 채우는 동안, 나는 양배추를 썬다. 일식 돈가스집 양배추보다는 3배쯤 굵게, 가지도 비슷한 모양으로 썰어 씻는다.

​“자, 고기 기름이 조금 나오면 거기에 이 채소들을 볶아줘. 다 익은 고기는 채소 위에 얹어두고, 빈 공간에 새 고기를 구우면 돼.”

​아이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척척 움직인다. 내가 집안일을 할 때면 항상 옆에서 “뭐 도울 거 없어?” 하며 기웃거리는 녀석이다.

​“엄마가 힘들어하는 것보다, 엄마가 행복한 게 좋아. 나 이제 다 할 수 있으니까 언제든 시켜줘. 그래야 일이 빨리 끝나고 엄마도 쉬지.”

​그렇게 우리는 주방에서 어깨를 부딪치며 함께 저녁을 만든다.

차돌박이가 언제쯤 다 익은 건지 진지하게 확인하며 신나 하는 아이의 뒷모습을 본다.

​“엄마, 나 차돌박이 많이 먹을 건데 이 한 팩 다 구워도 돼요?”

“그럼! 양배추도 듬뿍 넣었으니까 건강에도 좋을 거야. 많이 먹어.”

​아이가 고기를 굽는 사이 나는 파를 총총 썰어 맛간장과 꿀을 섞어 양념장을 만든다.

갓 지은 밥 위에 볶은 채소와 고기를 얹고, 후추 톡톡. 취향껏 양념장을 뿌리고 시어머니표 김장김치까지 곁들이니 완벽한 한 상이다.


​“잘 먹겠습니다!”

​수저를 들고 밥을 뜨려는데, 숟가락 끝에 묵직한 무언가가 걸린다. 밥 밑에 차돌박이들이 숨어 있다.

​“아들... 또 네가 엄마 밥에 고기 숨겨놨지?”

​요즘 다이어트를 한다며, 그리고 한창 크는 아이 더 먹이려고 내 밥그릇엔 고기를 덜 담았었다. 내가 김치를 가지러 간 그 짧은 찰나에, 아이가 제 밥그릇의 고기를 덜어 내 밥 밑에 깔아둔 것이다. 예전엔 밥 위에 얹어두니 내가 다시 돌려주는 걸 보고, 이제는 아예 보물찾기하듯 밥 밑에 숨겨둔다.

​“차돌박이 맛있어. 엄마도 많이 드세요~”

“에이, 엄마는 요즘 살 뺀다고 했잖아...”

“그래도 같이 맛있게 먹어야 기분이 좋죠.”

​휘리릭, 10분 만에 완성된 밥이지만 그 어떤 코스 요리보다 맛있다. 밥알 하나하나에 아이의 마음이 배어 있어서일까.


​식사를 마치고 아이는 나를 거실 소파 앞바닥에 앉힌다. 본인은 소파에 앉아 팔꿈치로 내 어깨를 꾹꾹 누르며 풀어주기 시작한다. 웬만한 성인 남성 덩치의 아이가 해주는 마사지는 숍에서 받는 것보다 훨씬 시원하다.

​“으으으으...”

“엄마 아파? 웃는 거야, 앓는 거야?”

“아니, 너무 시원해서 자꾸 웃음이 나.”

​어깨를 눌러주는 아이의 손길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미안해진다.

​“아들, 너무 엄마한테 잘해주려고 안 해도 돼. 엄마 너무 맞춰주려는 거 아니야?”

​아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한다.

“아니야. 엄마도 회사 다녀와서 피로 풀리면 좋고, 나도 엄마 도와주고 나서 게임하면 마음 편하니까 서로 좋지! 대신 나 게임 한 시간 하고 수학 숙제랑 코딩 동아리 마무리할게.”

​“응... 그냥 엄마는 네가 퇴근길에 반갑게 뛰어나오기만 해도 좋은데. 고마워.”

​이게 우리의 한없이 평범하고 소소하지만, 더없이 따스한 저녁 풍경이다.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

회사 생활과 가정생활, ON/OFF가 잘 되냐고.

​나는 자신 있게 대답한다. 너무 잘된다고.

집에 들어서는 순간, 회사에서의 치열했던 기억은 생각날 겨를조차 없다. 회사에서 깎이고 상처받은 마음의 '공백'이, 아이가 주는 크고 따스한 기운이라는 '여백'으로 꽉 차오르며 치유된다.

​아이는 나의 가장 든든한 파트너이자 동반자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온다.

물론 아이가 아프다는 전화에 반차를 쓰고 택시 안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날도 여전히 있다. 하지만 이제는 이렇게 서로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하루를 마감하는 날이 더 많아졌다.


​내 인생의 가장 큰 보물.

이 아이의 존재가 나의 성장과 성숙함, 그리고 진정한 ‘리더맘’이 되게 하는 가장 큰 동력이다.

​오늘도 나는 회사라는 전쟁터에서 물러나, 아이라는 안식처로 퇴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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