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불안함을 즐겨보려 합니다
주말 동안 아이와 부산 여행을 다녀왔다.
예전에는 1박 2일로 지방 여기저기 멀리도 자주 다녔는데, 요즘은 1박 2일 어딘가를 다녀오면 그 다음 주 일주일이 너무나도 피곤하다.
늘 캠핑을 갔었는데, 이번엔 오랜만에 호텔에 묵었다. '불멍'의 낭만이 한없이 좋은 나였지만, 이제는 그냥 몸만 쏙 다녀오는 편안함이 더 절실하다.
나, 늙었나 보다.
조식 뷔페에는 어린아이를 둔 가족들이 참 많았다. 모두 아이 밥을 먹이느라 정신이 없다. 나는 어느새 나보다 건장해진 아들이 스스로 밥을 잘 먹는 모습을 보며 커피를 마신다.
나도 저렇게 아이가 어렸을 적엔 참 많이 데리고 다녔는데... 오히려 지금이 손 안 가고 여행 다니기 딱 좋은데, 왜 그때 그렇게 사서 고생을 했나 모르겠다.
'지금이 여행을 더 잘 즐기는데… 지금이 적기인데.'
왜 나는 늘 이렇게 “너무 빨리” 모든 것을 해치우려 했나 모르겠다.
뭐든 빨리, 뭐든 늦을까 봐 걱정이었던 나는 “늘 불안했다”.
늘 불안함 속에 살았고, 그 불안함이 내 삶의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는 아이가 나의 불안함을 닮는 게 싫었다.
누구보다 마음 편하게, 그렇게 아이가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주말 부부인 남편을 중간에 내려주고 아들과 단둘이 분당으로 차를 몰았다.
아이에게 물었다.
"요즘은 시험도 끝나고 했으니…. 마음이 좀 편하지 않아?"
아이는 말했다.
"아니, 안 편해. 난생처음 시험이란 걸 봤는데, 이제 점점 더 이런 시험이 많아질 거고 또 수행평가도 있을 거고. 이렇게 중2, 중3, 고1, 고2… 살아야겠지? 그래서 너무 걱정되고 내가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불안해…."
아이의 말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래, 이제 아이도 마음 편히 노는 시기는 지났다. 계속 무언가를 해내야 하는 시기가 왔구나.
나는 핸들을 잡으며 아이에게 말했다.
"엄마는 말이지…. 뭔가 두려울 때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모두 그 순간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은 편해져.
나만 그런 상황이면 너무 무섭고 힘들 텐데, 세상 많은 사람이 나와 같은 일을 겪는다고 생각하면…. '나는 그래도 중간 이상은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나보다 상황이 안 좋은 사람들도 다 이걸 겪는데 나도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거지.
너도 너의 친구들, 형들, 동생들, 심지어 엄마 아빠도 모두 그 순간을 지나가고 있으니까. 그렇게 '모두가' 겪는 순간이라고 생각하면 덜 불안할지도 몰라."
아이는 조금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 아이의 불안처럼, 월급쟁이들은 인사이동 발령이 나기 전에도, 나고 난 후에도 “늘 불안하다”.
발령이 났다. CEO의 교체다.
심지어 전날까지도 CEO는 유임이었다. CEO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셨다. 그런데 발령 직전에 갑자기 바뀌었다.
유임된다는 전제하에 의기양양하던 기득권 세력들은, 하루아침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 앞에 사색이 되었다. 그들이 "카르텔"이라며 비난했던 사람들은, 새 CEO의 부임과 함께 24시간 만에 새로운 기득권이 되었다.
임원들은 산하 조직을 재정비하느라 분주하다.
팀장들도 불안함 속에 자리 보전을 위해 여기저기 소문을 나른다. 가장 기득권이었던 우리 상무님의 얼굴은 어둡다. 본인 자리도, 라인도 100% 확신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올해는 '인원 감축'이 1순위 과제다.
기존에 안정권이었던 임원들은 “비안정권”이 되었고, “비안정권”이었던 임원은 “안정권”이 되었다.
안정권 임원들은 요직으로 언제 갈지 궁금해하고, 비안정권 임원들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불안해한다.
서로들 안위를 물어보러 다닌다. 다들 “내 자리가 안녕한지”가 궁금하다.
결국 월급쟁이들은 모두 다 불안하다. 그 누구도 안위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
가졌던 자들은 잃을까 봐 두렵고, 일반 구성원은 “권고사직” 대상자가 될까 봐 두렵다.
이 와중에 어떻게든 존재를 공고히 하려고 공격적인 계획을 세우는 리더와,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하며 손 놓은 구성원들의 대립 또한 촌극이다.
나는 버티는 삶이 싫어서, 18년을 일했던 산업군을 바꿨다.'커리어 패스'가 아닌 '커리어 포트폴리오'를 선택했다.
Connecting Dots를 통해 나만의 유니크한 강점으로 오래 일하는 것이 꿈이라 이종산업으로 이직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선택이 나를 가장 급격하게 “버티는 삶“으로 몰아넣었다.
회사의 30%의 조직이 없어질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우리 팀도 그 소문 중의 하나의 팀이였다. 연줄 없는 팀장, 신생 업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였다.
시나리오는 1,2,3,4,5.... 무한한 시나리오 속에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팀을 흡수할 수도 있다는 시나리오 3에 해당되는 우리의 흡수를 맡으실? 이사님을 찾아갔다.
성골 중의 성골. 그래서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올 초 이사로 승진한 그분이었다.
솔직히 여쭈었다.
"저희 팀이 없어지고 흡수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그녀의 대답은 내 예상을 빗나갔다.
상무님과 그런 이야기를 한 건 사실이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본인 자리가 없어진다는 소문을 들어서 상무님께 사실 확인을 요청한 상태라고 했다. 심지어 상무님 자리도 바뀔 수 있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었다.
우리 팀을 없앨 사람도, 우리 팀을 받을 사람도, 그 누구도 본인의 자리를 모른다.
우리 모두가 불안한 이유는 딱 하나다
“우리 모두 월급쟁이라서…”
지난 겨울 호암 미술관에서 본 니콜라스 파티 전시가 떠올랐다.
사진 속의 저 그림이 “불안” 이라는 키워드가 가장 강렬히 연결되었던 작품이다.
지금 우리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은 마치 그림 속 빽빽한 붉은 숲처럼, 예측할 수 없는 수많은 변수들로 가득 차 있어 불안하기만 하다.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막막함이 밀려오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 거대하고 압도적인 붉은 숲은 사실은 파스텔로 그려졌다는 것을.
니콜라스 파티는 파스텔로 벽면을 그리는 작가이다. 모든 것이 영원한 것도 없고… 그냥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그 파스텔이 옅어 지고 사라지는 것이 그렇게 본인 작품이 사라지는게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영원할 것 같던 불안도, 파스텔 그림처럼 시간이 지나면 스르륵 흩어져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희망이라는 단어는 쓰고싶지 않다) 너무나도 명확히 나는 안다.
그렇다면, 나의 소중한 시간을 그 불안의 덩어리속에 파묻혀 보내기엔 너무나도 아깝다.
그림 앞을 묵묵히 지키고 있는 저 해태상처럼, 이 불안의 숲을 묵묵히 그리고 씩씩하게 걸어나가면 나와 함께하는 내 스스로를 시켜나갈 해태상이 내 마음속에 굳건히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리라
그래서 나는 이 불안 속에 두 가지를 준비했다.
하나는 나의 내년도 계획을 들고 나를 지지해줄 사업부장님들을 찾아가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내가 직접 연락하기는 상상도 못할 그런 분께 메일을 보냈다!
잔잔한 바다에서 어떻게 서핑을 즐기리….
파도야 마음껏 쳐라 나는 당당히 서핑을 즐길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