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three panels
이 이야기는 내가 겪은 조직에서 짧은 시간 동안 겪은 급격한 변화의 기록이다. 4개월(4편)로 나눠, 매달 분위기와 균열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한 편씩 꺼내 보여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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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9월. 우리 회사에 새로운 COO가 들어왔다.
그의 링크드인 프로필 얘기가 많이 돌았다. 앱 서비스 하나, 화장품 제품 하나. 여러 서비스에서 굴러본 경험도 있고, 자기 제품을 만들어본 경험도 있었다. 다른 회사에 있는 C레벨이나 임원들처럼 경험 많고, 단단한 사람 같았다.
난 근데 이게 그를 처음 본 첫인상에서 이상하게 세게 박혔다.
그의 이력은 화려한듯 깔끔했다. 과하게 꾸민 느낌이 아니라, 해본 것만 단정하게 정리해둔 느낌.
면접도 그 톤 그대로였다고 들었다. 말은 길지 않은데 정리가 돼 있고, 질문이 늘어날수록 답이 더 단단해지는 타입. 선택은 거의 만장일치였다. 그때는 그게 안심처럼 느껴졌다. 다 같이 같은 꿈을 꾸면, 더 빨리 달릴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면접 직후에 귀인이 나타났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으니까.
입사하자마자 팀원 한 명이 COO팀으로 붙었다. 자리 재배치, 채널 추가, 캘린더 정리. 그리고 그다음 날부터 회사는 진짜로 속도가 달라졌다. 그 속도가 내는 파장은 컸다. 이 빠른 속도에 우린 적응을 하느냐 못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새 시스템과 바뀌는 과정이 대부분 불편했지만 변화의 바람에 동의하는 자들에겐 기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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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회원을 물었다. 유저 상태가 뭐고, 인증 상태가 뭐고, 잠금 상태가 뭐고. 정상, 휴면, 탈퇴 같은 단어들이 그냥 단어로 끝나는 게 아니라 어떤 순서로 쌓여 있는지. 그래서 송금이 가능한 상태는 정확히 어디인지. 우리가 잡아야 할 코어 타겟은 어떤 세그먼트인지.
그 질문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은 일을 시작하기 전에 언어부터 정리하는구나.
그리고 질문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신분증 승인이 됐는데 계좌 인증이 안 된 사람은 어떤 상태로 봐야 하는지, 계좌 인증은 됐는데 신분증 승인이 안 된 사람은 어디에 놓이는지. 송금 가능한 사람 중에서도 우리가 말하는 액티브를 어떻게 구분할지. 숫자가 잡히지 않는 구간을 되게 싫어하는 느낌이었다. 빈칸을 그냥 빈칸으로 놔두지 않고, 구조로 채우려는 사람.
그 과정에서 이상하게 부드러운 문장이 하나 붙었다. 모르는 게 많다는 말, 그래서 질문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말. 그게 묘하게 크게 남았다. 보통은 들어오자마자 아는 척부터 하는데, 이 사람은 파악이 안 된 걸 파악이 안 됐다고 인정하는 쪽이었다. 그게 더 무서운 쪽이기도 했다. 파악이 끝나면 그다음은 보통 실행이니까.
그 질문이 던져지고 나서 회사 공기가 조금 바뀌었다. 그냥 열심히가 아니라, 무엇을 열심히인지부터 다시 잡자는 쪽. 감으로 하지 말고 숫자로 보자는 쪽.
그래서 자연스럽게 다음 화두가 VoC로 넘어갔다. 우리 VoC는 뭘로 보냐, 권한은 어떻게 받냐, 데이터는 어디 있냐. 보통은 개선을 하자고 말부터 하는데, 그는 개선을 하기 전에 개선의 재료가 어디 있는지부터 확인하는 느낌이었다. 접근 권한을 받고, 링크를 열고, 어디서 뭘 볼 수 있는지부터 정리하는 쪽.
이게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조직을 바꾸는 건 이런 사소한 순서 변화에서 시작한다. 말부터 하는 조직이 있고, 화면부터 여는 조직이 있다. 화면을 열기 시작하면, 그다음부터는 말이 달라진다. 말이 달라지면 책임이 달라지고, 책임이 달라지면 속도가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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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회의 기록을 더 잘 남기자고 제안했다. 다들 휴대폰으로 영상을 찍고 있었고, 그게 집중도도 떨어지고 나중에 찾기도 불편하다는 얘기였다.
그가 바로 답했다. 외부툴을 쓰기 전에 구글 밋을 붙이면 스크립트랑 회의록이 자동으로 남는다는 얘기. 단점도 같이 얘기했다. 말하는 사람이 구분이 안 될 수 있는데, 맥락으로 유추하면 된다고. 결론은 하나였다. 일단 되는 걸로 먼저 해보자.
이런 선택이 쌓이면 조직은 빨라진다. 완벽한 답을 찾기 전에, 지금 당장 굴러가는 답부터 고른다. 그러면 당장 효율이 올라간다. 효율이 올라가면 다들 좋아한다. 좋아하는 순간부터, 그 방식이 표준이 된다.
그때는 그냥 편했다. 어차피 다들 바쁘니까. 어차피 다들 기록이 필요하니까. 그런데 이게 누적되면, 회의는 회의로 끝나지 않는다. 기록이 되고, 기록이 근거가 되고, 근거가 관리로 넘어간다.
그는 회사가 말로 움직이지 않고 기록으로 움직이길 바랐다. 그리고 기록은 생각보다 빨리 사람을 바꾼다. 말할 때 조심하게 만들고, 회의에서 질문을 줄이게 만들고, 애매한 표현을 싫어하게 만든다. 기록은 친절한 동시에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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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은 실시간 현황판(대시보드) 얘기가 나왔다. VoC나 CS 상황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냐고, 인입/대기/통화중 같은 상태를 국가별로, 담당자별로 띄울 수 있냐고. 이건 도구 얘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세계관 얘기였다. 지금 우리가 어디서 시간을 잃는지, 어디서 고객 신뢰를 잃는지, 체감 말고 화면으로 보자는 쪽.
그리고 그 세계관은 자연스럽게 개발 쪽으로도 넘어갔다.
출근 전에 지표를 바로 보고 싶다. 그러려면 데이터 복제나 백업이 끝나는 시간을 당길 수 있냐. 개발 쪽에서는 현실적인 이유를 길게 설명했다. 새벽에 덤프 뜨면 시간이 걸리고, 파일을 복사해야 하고, 디비가 여러 개고, 안정성 때문에 보수적으로 잡아놨고.
그는 거기서 밀어붙이는 대신, 말을 조금 바꿨다.
가능한 범위 내에서 시간을 앞당길 수 있으면 좋겠다. 지금도 충분히 빠르지만, 앞으로 우리가 더 빠른 시도를 하기 위해 고민할 시간을 벌고 싶다.
이게 신기했다. 보통 속도는 야단으로 나오는데, 여긴 논리로 나왔다. 빨리하자는 말이 아니라, 빨라지면 우리가 더 생각할 수 있다는 말. 속도를 사람을 닦달하는 언어로 쓰지 않고, 시도를 늘리는 언어로 쓰는 방식.
근데 나는 그때도 알았다. 속도가 철학이 되는 순간부터, 느린 건 단순한 지연이 아니라 죄가 된다. 누군가는 그 죄를 뒤집어쓰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조직은 왜 늦었는지보다, 누가 늦췄는지를 찾기 시작한다.
그날도 결국 작은 개선 요청 하나가 이슈로 만들어지고, 다음 달 작업으로 잡혔다. 사람들은 농담도 하고, 가볍게 웃기도 했다. 근데 그 가벼움이 오히려 더 정확했다.
아, 이제 이런 속도로 가는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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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 장면이 그 달의 공기를 만들었다.
빨리, 정확히, 기록하고, 보면서 움직이자.
그건 틀린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필요한 말이었다. 문제는 필요한 말이 항상 안전한 말은 아니라는 거다. 필요한 만큼 사람을 밀어붙이기 시작하면 조직은 빠르게 정리되지만, 동시에 어딘가가 조용히 닳는다.
우린 질문이 줄고, 대화가 짧아지고, 누가 결정했는지보다 누가 승인했는지가 중요해지는 순간들이 조금씩 찾아왔다. 정확해지는 게 자유로워지는 건지, 말수가 줄어드는 시작인지 헷갈리는 순간들이 생겼다.
그 달에는 모두가 웃으면서 따라갔다. 속도가 필요하다는 걸 부정하기 어려웠으니까. 우리한테는 변화가 절실히 필요했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속도가 아니라 사람들의 호흡을 보게 됐다. 누가 숨을 참고 있는지, 누가 너무 오래 참았는지.
첫 달은 그렇게 시작됐다. 조용하게, 그런데 분명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