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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은 Nov 11. 2019

The record #23_내일은 있어

“내일은 없어도 돼.”

@ocvisual / https://unsplash.com/@ocvisual

“내일은 없어도 돼.”

당신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 호텔에서 하룻밤 묵자는 내 제안에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올해 봄, 엄마의 긴 약물치료 시작을 응원한다는 핑계로 우리는 서울의 한 호텔에서 이틀을 지냈다. 엄마를 위한 시간이라고는 했지만, 나로서도 첫 호캉스였기 때문에 작은 가방을 싸면서 마음이 가볍게 들떴다. 엄마는 딸 덕분에 40년 만에 호텔에서 자본다고 수줍게 말했다. 그때 하마터면 나는 이렇게 말할 뻔했다. 엄마, 그런 거라면 처음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최초의 경험으로부터 40년이나 지나버리는 삶을 나는 알 수 없어서, 엄마의 어떤 고백들은 자주 나를 먹먹하게 만든다.


이틀 동안 우리는 광장시장에서 녹두전을 사 먹고 비 오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걸었다. 개나리 앞에서 포즈를 취하면서 창경원 이후의 창경궁은 처음이라고, 엄마는 또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외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창경원의 동물들을 구경했을 어린 엄마가 상상되지 않았다. 명동의 오래된 칼국수집도 엄마는 옛 친구와 조우한 것 마냥 신기해했다. 남산의 케이블카도, 소문으로만 듣던 태극기 부대의 소란함도, 광화문의 고요한 야경도. 엄마에겐 많은 것들이 처음이거나, 거의 처음인 것들이었다.


그 짧은 하루들에 엄마가 얼마나 신나했는지, 몇 번이고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는지 엄마는 까먹고 나만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다. 엄마는 당신이 그날을 자주 떠올리게 될까 봐 겁이 나는 것 같다. 언젠가 몰래 본 엄마의 일기가 생각나 나는 또 가슴이 콱 막혀버린다.


‘2박 3일이 금방 지나갔다. 다시 집에 와 밥, 반찬, 빨래, 청소... 평범한 주부의 일상이 시작됐다. 그런데 왠지 너무 편안하다. 나 스스로 번 돈으로 2박 3일을 썼다면 참 좋았을걸. 딸이 힘들게 번 돈을 쓴 게 조금 걸린다. 자꾸 이런 말을 하면 은혜가 싫어하니까 그냥 고맙다고, 행복했다고 말해야지.’


호텔의 ‘호’자도 꺼내지 말라는 엄마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엄마, 엄마는 왜 좋았던 건 꼭 한 번으로만 만족하려고 해? 그걸 두 번, 세 번 즐기면 안 되는 거야? 그럴 수 있는 내일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이야?”


“나는 그런 내일 없어도 돼.”


왜 함부로 확신하는 걸까. 엄마는 언제부터 이렇게 살아왔던 걸까. 익숙한 오늘에만 머물러도 괜찮다고. 자꾸만 내일을 기대하려는 자신에게 주문처럼 되뇌었을 엄마를 생각해본다. 이 삶도 처음에는 낯설었을 거면서.


“엄마 마늘 빻아야 돼, 바빠. 이제 끊어.”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깜깜한 휴대전화를 바라만 보았다. 호텔이야 멋대로 예약해버리면 그만이다. 취소가 안 된다고, 수수료를 반이나 물어야 한다고 거짓말을 하면 못 이기는 척 따라올 엄마를 안다. 그런데 앞으로도 엄마를 억지로 내일에 데려다 놓아야만 하는 걸까. 그래야만 엄마는 겨우 내일이 있구나, 알게 되는 걸까.


당신에게 내일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아침 요가를 마치고 부리나케 메일과 전화를 돌리고선 작은 짐을 쌌다. 오늘은 엄마의 육십 번째 생일. 미리 오붓하게 축하의 시간을 보냈지만 서프라이즈로 당진행을 벼르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이 시골에 내려와 살까.. 지금도 가끔 답답할 때가 있는데, 훌쩍 버스에 앉아 있으려니 서울서 한 시간 반이면 도착하는 곳이라 그나마 다행이었지 싶다. 서너 시간 걸리는 동네였으면 엄두를 못 냈을 약은 나를 아니까.


야심차게 집에 왔지만 엄마와 아빠는 외출을 한 모양이었고, 끝물의 가을볕을 맞으며 마당을 둘러보았다. 계절의 고운 색이 깊이 물든 풍경인데 어쩐지 쓸쓸하기만 했다. 매일같이 마당에 혼자 앉아 오후를 보내는 기분은 이런 거구나, 언젠가 훔쳐본 엄마의 일기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오늘따라 까미도 멀리 나갔는지 안 보였다.


엄마: 너 어디야?

나: (엄마) 집이지.


두 시간이나 지났을까, 아빠의 파란 차가 앞머리를 드러냈다.

엄마의 추리닝과 카디건을 입고선 손을 흔들었다. 엄마 안녕! 생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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