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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간의대지 Mar 23. 2021

[영화] 라스트레터- 응답하는 부재들

영화 라스트레터(last letter, 이와이 슌지, 2020) 리뷰

이와이 슌지의 세계에서 부재하는 존재는 응답한다

[Post box office]

이와이 슌지 감독의 최신작 라스트 레터(Last letter)는 영화인으로서 여정의 첫걸음이라고 스스로 지칭한 작품 러브레터(Love letter)로부터 25년이 흐른 지금에서야 우체통(Post box), 영화관(Box office), 유튜브 영화(Post - box office)에 동시 개봉했다. 유사한 제목에서 드러나듯 여전히 편지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부터 죽은 첫사랑을 향한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의 여정이라는 이야기의 맥락까지 닮은 두 영화는 시차를 두고 독서카드에 차곡차곡 적힌 한 쌍의 ‘후지이 이츠키’ 이면서 한 세대를 건너 ‘환생한 듯한 모녀’ 관계처럼 느껴진다. 그렇지만 두 영화가 어떤 면에서 자매품인지 그래서 어느 쪽이 쿄시로에게 실패한 고백을 한 동생인지, 달리 말해 감독이 자기 영화에 대한 오마주에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에 대해서 쓰지 않을 것이다. 대신 25년이 흐른 지금까지 감독이 기꺼이 뛰어들고 있는 ‘어려움’과 왜 다시금 ‘편지’ 여야 했는지에 대해 귀를 기울여 보고자 한다.


[합장하는 서사]

영화는 찬란한 여름의 한 구석을 두드리는 작은 폭포로부터 돌아선 아유미가 어머니 미사키의 장례식장으로 향하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미사키의 죽음에서 시작한 영화를 이끌어 가는 것은 죽음에 대한 인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착각이다. 아유미 미사키와 똑 닮아서 마치 ‘미사키가 환생한 것과 같은 모습’을 갖고 있으며 미사키의 동생 유리는 부고를 전하러 간 고교 동창회에서 미처 해명하지 못한 채 ‘미사키로 오해받는다.’ 미사키의 죽음에서 뻗어나간 두 개의 착각,  미사키-아유미와 미사키-유리, 은 미사키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쿄시로가 두 명의 미사키와 편지를 주고받게 만든다. 미사키들과의 편지 왕래는 그녀의 과거에 대한 기억을 보여주면서 관객에게는 죽은 미사키라는 인물의 삶에 더 깊숙이 발을 들이게 만든다. 관객에게 영화는 미사키라는 ‘모르는 사람의 죽음’에서 시작해서 ‘미사키의 삶’으로 나아간다. 반면 영화 속 인물들이 겪는 일은 관객과 정반대이다. 그러니까 영화의 도입부에서부터 등장인물들은 아직 ‘미사키의 삶’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쿄시로, 유리, 아유미는 죽은 미사키와의 서신 왕래에 기꺼이 참여하고 있으며, 결정적으로 미사키 딸은 아직 미사키의 마지막 편지를 차마 펼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처음에 미사키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으나 점차 이를 인식하고 애도하기 위한 여정에 있다. 


그러니까 영화가 진행될수록 관객들은 이미 벌어진 미사키의 현재, 죽음으로부터 과거 기억 속의 미사키의 삶으로 향하고 있으며 (시간축에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등장인물들은 미사키가 살아있던 시절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다가 점차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흘러든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향하는) 관객과 인물들 각각에게로 교차하는 서로 다른 감정의 방향을 영화 초반부에 등장한 일본식 장례 문화의 합장하는 양손에 비유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합장하는 두 손이 허공의 어디에서 출발했 건 미사키에서 만난다.  


[명백한 목격의 효과 - 1인 2역과 2인 1역]

이와이 슌지 감독은 레터 시리즈에서 모두 주연 배우에게 1인 2역을 연기하도록 했다. 러브레터에서 나카가미 미호는 한 남자를 사랑한 전혀 다른 두 명의 여인을 연기해야 했고 라스트 레터에서는 히로세 스즈와 모리나 나가 미사키 자매의 어린 시절과 그들 각각의 딸을 동시에 연기해야 했다. 단순히 제작비를 절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정말 개런티가 비싼 배우들을 총망라했기 때문에 그런 이유가 아주 없었으리라고는…) 감독이 ‘닮은 배우’를 쓰지 않고 ‘같은 배우’를 쓸 때 생길 수 있는 효과의 차이를 고려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 본다.

 

단순히 1인 2역을 연기한 배우의 연기력을 평하는 것보다 흥미로운 일은 이 영화가 1인 2역과 2인 1역을 대칭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쿄시로라는 ‘동일한 배역’의 현재와 과거를 ‘다른 배우’가 연기할 때 이야기를 보는 관객은 ‘같은 사람’이 시간을 두고 외관상 달라진 것을 명백하게 목격한다. 또한 히로세 스즈라는 ‘동일 배우’가 미사키와 아유미라는 ‘다른 배역’을 연기함으로써 관객은 이야기 속에서 ‘다른 사람’이 시간을 두고 (심지어 미사키는 죽었음에도) 같아진 것을 명백하게 목격한다. 서사의 개연성이나 윤리적인 당위성 따위로 설득하기도 전에, 아니 그 보다 높은 차원에서 관객은 그 장면을 본다. 쿄시로가 다르게 변한 것과, 미사키가 환생한(듯한) 것을. 영화는 어떤 이유를 초월해서 관객에게 장면을 목격시키기에 훌륭한 양식 일지 모른다.

 

부연하면 쿄시로는 평생 미사키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다. 그는 소설가이지만 단 한 권의 책 ‘미사키’만을 썼고 미사키라고 착각한 유리에게 ‘너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면 믿겠어?’라고 말한다. 그러던 그가 자신이 따라잡지 못했던 미사키의 죽음과 삶을 깊이 알게 되면서 미사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마침내 자신만의 소설을 쓰기 위해 도쿄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즉 영화의 서사는 쿄시로를 변화 켜서 나아갈 수 있게 만들며, 동일인물의 변화를 표현하기에 ‘같은 배역 - 시차를 둔 다른 배우’ 조합이 효과적이었으리라는 점이다.

 

맥락은 유사하지만 미사키의 경우는 감독이 조금 더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이다. 사람이 변한다는 명제보다 죽은 사람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설득하기가 더 어렵기 때문이다. 아무리 아유미가 미사키의 딸이라지만 실제로 ‘다른 사람’이 “완전히 똑같을” 수는 없다. (게다가 망나니 남편의 피가 섞인 얼굴에 망나니 가루가 한 톨도 묻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럼에도 영화는 ‘다른 사람을 동일화’ 시키는 동시에 ‘죽은 자를 산 자와 동일화’ 시키고 있다. 이를 통해 관객은 이야기 속에서 미사키가 아유미로 환생한 것을 일단 ‘목격’하게 됨으로써 두 인물을 하나의 이미지로 겹쳐놓게 된다. 관객은 시각이 제공한 명백한 동일성으로 인해 실제와 괴리 있는 것의 맥락을 이해해줄 준비를 할 수 있다.

 

그리고 관객에게 발생한 이미지의 중첩은 서사가 두 가지 방향으로 흘러가도 괜찮도록 만들어준다. 첫 번째 방향은 미사키 딸이 미사키를 따라서 똑같이 자살하는 이야기이다. 미사키 딸이 미사키의 환생이라면 뒤따라 죽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두 번째는 우리가 영화에서 목격한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미사키는 죽어서 여기 없지만 그녀를 사랑하고 간직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다시 있다. 그리고 그녀에 대해 쓰고 말하는 행위는 그녀를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다시 있게 한다. 다시 말해 영화는 “같은 배우 - 시차를 둔 다른 배역”을 사용함으로써 미사키라는 인물을 되살려(환생과도 같은) 간직할 수 있었다.     


영화는 배역-배우가 서로 동일하지 않다는 영화적 특성을 활용해 쿄시로에게는 변화를 선물하고 미사키를 간직했다. 이를 지켜본 관객은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밖에 없다. 영원히 잃어버린 것. 그리고 상실을 차마 받아 들 일 수 없어 외롭던 시절 전체가 그리워하던 자신만의 무엇에 대해서. 어쩌면 찬란한 여름날 끝없이 쏟아져 흩어진 폭포의 조각과도 같았던 짧고 빛나던 순간을.


[Letter]    

영화를 애도(인물-죽음 인식, 관객-삶 인식)와 구원(죽은 미사키는 간직되고 멈춰 선 쿄시로는 나아감)으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다면 그 복잡한 과정은 연이은 편지의 몫이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인터뷰에서 자신의 영화 세계에서 어쩌다 보니 편지라는 것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어쩌다 보니라니. 러브레터와 라스트 레터를 본 관객이라면 어쩌다 보니 수준보다는 편지라는 방식이 가진 특징이 영화에 밀접히 연관될 수밖에 없었으리라고 추측해본다.

 

편지는 현재 존재하는 의사소통 도구 중에서 가장 느린 매체가 되었다. 영상과 음성이 실시간으로 지구 반대편으로 도달할 수 있는 시대에 이와이 슌지는 남편의 질투로 휴대폰을 물에 빠뜨려가면서까지 인물들에게 편지 쓰기를 강요했다. 그렇지만 한 번이라도 편지를 써본 사람이라면 편지가 최고의 효율을 갖는 점은 속도가 아니라는 점을 너무나 명백하게 알 수 있으리라. 마음을 전하려고 쓰기 시작한 편지는 언제나 애초에 건네주려 했던 만큼의 마음을 더 키워버린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연인과 기념일에 편지와 선물 중 어느 한쪽만 골라야 한다면 무엇이 덜 혼날 선택일지 생각해보자) 편지를 쓰는 느린 시간 동안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 어느 때보다 열렬히 생각한다. 편지가 상대에게 전해지리라 예정된 날까지의 잠 못 이루는 밤들 속에서 이미 보낸 편지에는 아직 없었던 말들이 금세 자라나 마음속을 소란스럽게 한다. 편지는 메시지를 받을 사람을 떠올리고 상상하고 마음을 키우는 것에 가장 효과적인 매체인 것 같다. 그래서 영화가 쿄시로의 입장에서 미사키와의 편지를 착각한 두 명의 미사키와 주고받는 과정은 그들의 마음속에 흐릿해져 가는 미사키를 다시 짙게 살려낸다. 메시지의 전달이라는 측면에서 비효율적인 편지 사이의 기다림은 대상에 대한 우리의 마음을 강화하고 새로운 메시지를 생성하는 힘을 준다.

 

영화는 우리가 기다리는 만큼 편지가 쉬지 않고 갈 것이므로 저 멀리, 다른 매체로는 갈 수 없는 지점까지 갈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다시 말해 우리가 편지를 쓸 때 걸리는 시간이 상대방을 더 깊게 생각할 힘을 부여하듯이 편지가 오고 가는 지난한 시간은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어떠한 간극도 능히 건널 수 있을 만큼 충분하다고 상상하게 한다. 영화는 작은 간극에서 시작해 더 큰  간극을 넘게 하고 그 힘을 오고 가는 편지에서 빌려 온다. (유리의 장모는 편지를 통해 오래전에 지나쳐온 젊은 자신을 되찾는다. 유리는 첫사랑과, 아유미는 엄마의 찬란한 시절과 만난다. 그리고 쿄시로는 편지를 통해 첫사랑의 생략된 시간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다면  큰 의미에서 모두 편지(letter)다. letter란 곧 문자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므로 소설 미사키, 미사키의 졸업식 축사가 모두 편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편지로 인해 인물은 시간을 넘고, 기억을 현실로 재현하고, 경계를 넘고, 마침내 삶과 죽음 사이를 넘는다. 미사키는 편지(letter)를 통해서 다시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 곁에 숨 쉰다.


[응답하는 부재들]

영화 러브레터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물론 설원에서 목놓아 부르는 대사 “오겡끼데스까!”가 울려 퍼지는 장면이다. 정반대의 스펙터클이지만 영화 라스트 레터에서 쿄시로가 착각한 미사키(유리)에게 ‘내가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는 걸 믿을 수 있나요?’라는 문자를 보낸 장면은 추구하는 바가 같다. 그러니까 갈 길을 잃은 그리움이 부재(不在)하는 존재를 향해 간절히 부르는 목소리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와이 슌지는 25년을 간격으로 둔 두 영화에서 여전히 응답할 수 없는 자에게 질문하고 고백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런데 이와이 슌지 영화에서 무용한 부르짖음의 결과는 어떠한가? 우리가 두 영화에서 보았듯이 이와이 슌지의 세계에서 부재하는 존재는 응답한다. 그것은 원래 부재하는 존재로부터가 아니라 그를 간절히 그리워하는 주변 인물들로부터 온다. 러브레터에서 첫사랑 후지이 이츠키에게 보낸 편지들은 그의 연인으로부터 응답받는다. 라스트 레터에서 쿄시로가 미사키에게 보낸 편지들은 그녀의 동생과 딸로부터 응답받는다. (어릴 적 쿄시로가 보낸 편지를 유리가 몰래 답장했던 에피소드는 그런 맥락에서 중요하다)

 

편지는 상대방이 보낸 답장을 받아보고 나서야 내가 보낸 편지가 잘 도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답을 듣지 못한다면 우리의 질문은 울부짖음에 그칠 것이다. 우리의 부름은 응답으로 인해 증명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그리움은 제 길을 찾아 힘껏 간극을 뛰어넘는다. 그러니까 나의 부름이 어떤 식으로 건 응답을 받을 때 그리움은 내가 부르는 대상의 존재를 알아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에 어떤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리움의 도약을 오랜 시간을 들여 관객에게 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따라서 쿄시로가 영화의 끝에서 미사키를 간직한 채 도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부재로부터의 응답을 충분히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여전히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쿄시로는 그 응답을 유언이 된 졸업식 축사를 통해 들었다. 또한 미사키가 고통받는 삶 속에서 자신이 보낸 편지와 자신이 수정해준 졸업식 축사를 마지막까지 간직했다는 사실로부터 충분히 들었다. 


납북 이후 죽은 줄로만 알았던 시인 백석의 밝혀지지 않은 시간을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소설 쓰는 사람 김연수'는 ‘꿈꾸었으나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이 소설이 된다’고 했다. 이와이 슌지는 소설가나 영화감독이 되려고 무언가를 쓰지 않았으리라. 그는 그저 그리움을 방치할 자신이 없는 사람인 것이 아닐까. 그가 그리워했으나 만날 수 없는 것들 때문에 어쩌다 보니 만든 이야기들로 인해 우리만의 고유한 그리움들도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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