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간의대지 Mar 28. 2021

[영화] 어둠 속의 댄서 - 한 영화의 죽음

영화 <어둠 속의댄서> & 소설 <이방인>


영화는 어둠을 향해 도약한다. ‘그 사이를 넘어왔다’는 서술. 그것은 인간적이고 영화적이다.

영화(Movie) 어원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다른 예술 양식과 가장 손쉽게 구분할  있는 요소는 아마도 움직임일 것이다. 영화는 움직이는 대상이나 정지된 대상을 움직이는 카메라로 포착해서 스크린에 투사할  관객이  움직임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가장 단순한 서사의 전달부터 넘치는  걸음을 내딛는 영화적 성취도 움직임의 중력 아래 놓여있다영화의 움직임은 비슷한 그림이 빠르게 나열될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에게 벌어지는 시각적 잔상 효과를 통해서만 생성될  있다관객은 정지된 그림 사이의 측정할  없는 어둠을 도약함으로써 그림과 그림을 사이를 연결하는데 그것이 영화의 기본 단위쇼트이다. 쇼트가 모이고 씬이 모이고 시퀀스가 모여서 영화가  영화 제작에서 편집(編輯) 언젠가 존재할 가능성으로서의 연속체를 미리 잘라낼  있는 기적이라기보다는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점들을 엮고(), 모으는(가장 인간적인 수준의 노동이다. 영화의 보폭이 어둠 속을 내딛는 동안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은 저마다  어둠을 도약하는데 오직 그때만 보폭들은 흐릿한 춤이 된다.
 
 <어둠 속의
 댄서> 체코에서  이방인 셀마가 유전적으로 점차 시력을 잃으면서 겪는 비극이다셀마는 시력을 잃으면서도 아들 진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된 노동을 기꺼이 감수하며 가능한 행복(남자 친구, 아들의 생일선물) 모두 포기하며 돈을 모은다그런데 영화가 비극을 만들어가는 방식은 관객의 공감을 얻기 상당히 어렵다영화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건인 셀마의 살인에 있어서 자신이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들이 그녀가 살해를  수밖에 없도록 짜여 있다마치 고대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과 같이 그녀가   있는 일들은 별로 없다또한 셀마는 마치 성자(마리아) 같이 모든 불합리한 것들을 받아들인다인물의 장점 또는 심사숙고한 선택이 모여 역설적으로 비극을 가져오게 되는 요즘 관객에게 익숙한 비극 서사의 구성 방식과는 정반대이다.
 
 
관객이 인물의 비극을 개연성 있게 따라가지 못할  이야기는 신파적으로 느껴진다영화가 신파적인 느낌을   관객은 인물에 대한 감정적인 유대가 끊어지며 사건 간의 연결이 작위적으로 느껴진다상단에 서술한 영화 편집의 기워 붙인 단면의 박음선이 서사에 그대로 비춰 보이는 것이다만약 영화가 관객에게 매끈하게 연결된 서사를 보여주고자 한다면 박음선의 표면을 덮어야 할 것이다그러나 <어둠 속의 댄서> 불연속 한 서사는 아래에 서술할 몇 가지 덩어리 간의 불연속과 대립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부조리]
 <어둠 속의
 댄서> 서사 자체이자 형식으로서 역할하는 것은 여러 가지 형태의 ‘죽음이다영화 러닝타임 중점에는 셀마가 빌을 살해하는 장면이 나온다 장면은 자살할 용기가 없는 빌이 부탁한 것으로서 동기적으로는 빌의 ‘자살‘ 결과적으로는 셀마의 ‘살인으로 얽혀있다그리고 흥미로운 점은  비극적인 사건이 각각 유전병과 유산이라는 개인의 선택과 관계없이 근본적으로 존재하는 불안 요소에 기인한다는 점이다. 또한 셀마의 유전병이 점차 눈이 머는 것이라는 점도 상징적이다영화에서 셀마가 점차 비극의 소용돌이에 빠져 죽으며 끝나듯이 눈이 점점 어두워져 완전한 어둠에 다다르는 병은  죽을 운명에 있는 인간 존재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따라서  서사는 특정 인물의 선택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가 짊어진 근본적인 문제죽을 운명에 처한 자의 삶의 의미에 대한 상징이다또한 정확히 영화를 이분으로 나누는 경계가 되는 셀마의 살인 이후의 판결과 사형에 대한 이야기는 구조적으로 카뮈의 <이방인> 동일하다소설 <이방인>에서도 뫼르소는 개인적인 원한 없이 태양 빛이 너무 뜨거워서 어느 아랍인을 살해한  판결을 받고 사형당한다그는 다음과 같이 자문하는 부조리한 상황에 처해있다. 내게 살인의 의사는 추호도 없었지만살인의 결과는 엄연히 있다나는 유죄인가무죄인가?”
 
 
이방인인 셀마와 뫼르소의 판결 과정이 동일하게 자신의 진정한 맥락과는 무관하게 타인들의 판단과 생각에 의해서 멋대로 규정지어지는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읊조린다.  삶에서 나는 빠져있다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진술하는 것으로만 나는 규정된다나는  삶의 이방인이다.” <어둠 속의 댄서> 영화 전체에서 전하고 자하는 것은 부조리의 감수성이다그렇다면 <어둠 속의 댄서> <이방인>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면  나아가고 있는 점은 무엇일까. 둘이 다루는 주제가 유사하다면  차이는 형식에 있을 것이다영화와 책의 차이움직임이다움직임이 차이를 만든다친절함그리고 어떤 반항의 방식과 영화의 미래에 대한 것이다.
 
 [
친절함]
 
모순되는  대립항의 공존 상태가 부조리한 상태 <어둠 속의 댄서> 그러한 대립항을 시각과 청각의 요소를 활용하여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환기시키고 있다먼저 화는 “뮤지컬 장면 “다큐멘터리라는 가장 극명한 양식을 연달아 보여주고 있다 양식의 양극 단성은 서사적인 이유도 함께 가지고 있다감독의 의도성에 따른 왜곡을 차치한다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에 적합한 다큐멘터리는 셀마가 쳐해 있는 가혹한 현실을 포착하기에 적합하다또한 다큐멘터리적인 영화 장면의 카메라 움직임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부산히 고개를 돌리면서 줌인/줌아웃 사이에 초점이 흐려지는데 점점 눈이 멀고 있는 셀마의 시선과 닮았다. 또한 극 중에 셀마가  기꺼이 매혹당하는 있는 세계, 뮤지컬의 세계는 셀마가 현실의 소음으로부터 상상하여 빠져드는 이상적인 세계이 뮤지컬의 화면은 100개의 카메라로 촬영되었는데 인간의 시선으로는 불가능한 시점의 쇼트가 대다수 포함되어 있다마치 모든 각도로부터 날아오는 시선을 받는 존재는  완전한 무엇이라는 가정에서 촬영한 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한 감독의 인터뷰 내용이 있다. " 영화는 뮤지컬 장면과 다큐멘터리라는 서로 다른  '모습' 한데 담고 있다나는 뮤지컬 속에 다큐멘터리 스타일을 도입하는 것이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는 근본적으로 뮤지컬에 대한 경외로부터 나온 발상이다.”
 
 
잔혹한 현실과 경외의 세계는 6 정도 오가는데  화면의 배우들은 준비 없이가차 없이 전환된다. 관객은  대립항의 공존을 보되  박음선을 인식하게 된다그리고 영화가 마지막에 도착하려는 곳은 마침내 관객 자신이 무의식 중에 도약해온 어둠에 대한 의식이다.
 
 [
어둠 속의 도약]
 
영화는 마지막으로 죽음과 삶의 대립항의 공존을 보여준다셀마는 계단과 아래에 있는 관객을 통해 표현된 높은 곳에서 진을 향한 노래를 부른다관객은  신을 보는 매 순간 셀마가 노래를 끝마치기 전까지는 노래의 다음 음이 계속 이어져 있을 것이라는 예감을 가지고 영화를 본다. 그러나 난데없이  기대는 감독에 의해 깨진다. 관객은 준비 없이 셀마의 노래가 목뼈가 부서지고 쥐고 있던 안경이 곤두박질치는 소리로 순식간에 넘어간 것을 본다 이어질 것으로 예상하던 노래가 끊어지는 눈이 완전히 멀어 버리는 빛이 어둠이 되는 삶이 한순간 죽음으로 추락하는 움직임이 멈추는 그것들의 상이 관객의 머릿속 스크린에 맺힌다. 셀마의 죽음을 구경한 사람들이 나갈  있도록 형장의 문을 열어주는 장면은 마치 영화 상영 행위 자체를 상징하는 듯하다따라서 영화 속의 구경꾼과 영화를 보는 관객은 같은 입장에서 인간의 부조리필연적으로 죽을 운명에 처한 인간 존재의 우연한 삶의 의미 부재에 함께 던져진다.
 
 
이제 카메라는 바닥에서 천천히 상승한다급격하게 추락한 높이를 천천히 쓰다듬는 카메라의 시선 위에서 마치 도약이 추락을 극복하고도 한참 남는 것처럼 보인다.  시선은 초월적이다. 카메라 시선은 영화 내의 층간을 허물고  올라가서 영화에게 허용된 무대 자체를 뚫고 올라간다. 그러나 영화의 무대를 벗어난 순간에도 <어둠 속의 댄서> 영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위에는 완전한 어둠이 있다이것은 Credit영상이 아니다아직 영화의 카메라는 어둠을 도약하는 중이다영원하다는 거짓말에 솔직한 것이자 끝이라는 것을 거부하는 . 그렇게 카뮈의 반항을 정의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둠 속의 댄서>에서 셀마는 끝나지 않는 노래를 부른다. 마지막 노래가 나오면 너무 싫지 않아요갑자기 카메라가 공중으로 높이 치솟으니까 끝이라는  알잖아요그래서 마지막 노래가 나오기 전에 나와버리는 거예요”라는 셀마의 대사로 위의 내용을 요약해볼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반항의 방식과 영화의 미래에 대한 하나의 비약이다셀마의 희생적인 죽음으로부터 피어나는 것은 완전히 영화의 프레임 밖에 있는 진이다셀마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은 A.D. Mantle 판사인데 부활한 그리스도와 달리 셀마인간은 죽음으로부터 되살아날  없다대신 영화는 인간에게 허락된 수준의 부활인 전승을 반항의 한 가지 형태로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진은 셀마와 같은 운명이었으나 셀마의 희생을 통해 눈을 얻었다 역시 피할  없는 운명의 판결에 의해 죽을 것이지만 우리가 끝이라고 하기 전까지 그것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죽음과죽을  사람 사이의 도약이 부조리에 대한 반항의 방식이 된다면 그것은 영화의 미래에 대한 기도처럼 보이기도 한다영화가 정지된 그림과 정지된 그림 사이의 인식의 도약에서 출발하듯이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영화와 영화는 또한 측정할  없는 어둠을 넘어 끝없이 부활하는 것들이다어쩌면 <어둠 속의 댄서> 마지막에 하나의 영화를 뚫고 끝없이 상승하는 카메라 움직임은 영화의 미래에 대한 낙관이라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는 다음에 우리가 삶의 어둠 속을 헤맬  그것이 도약하는 중일 것이라고 여기기를 원할 것이므로.
 
 덩어리 사이에 대해서 ‘ 공간이 있다’라고만 말할  그것은 물리적인 상태에 대한 서술이다. ‘초월자가 있다   그것은 종교적이다. ‘아무것도 없다 말할  그것은 철학적이다그렇다면 ‘ 사이를 넘어왔다 서술그것은 인간적이고 영화적이다.

작가의 이전글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 그림자의 사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