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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간의대지 Mar 30. 2021

[영화] 사울의 아들– 이후에게 미소를

'이후'에게 미소를


히틀러로 대표되는 집단 광기에서 촉발한 독일 우월주의라는 빅뱅은 거의 모든 것을 거의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시켰다. 책상 위에 놓인 전선 지도에 검게 그려진 구불구불한 국경을 빨간 직선으로 긋는 동안 수많은 것들이 잘려 나갔고 운이 좋게 잘려 나가지 않으면 그건 오를 수 없는 절벽이 되었다. 영화는 참혹한 현실이었던 과거의 한 단면을 날 것 그대로 보여준다. 


머릿속의 무언 가가 단선되지 않으면 삶을 지속할 수 없는 곳에서 사울은 가스실에 들어갔으나 아직 숨이 붙어있는 아이를 발견한다. 사울은 반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도 않고, 사진을 찍어서 연합군에 알리는 일에도 의지가 없다. 사울은 현재가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없게 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과거로부터 단절되었으며, 기대할 미래에 대해서 그렇다. 사울의 현실은 장작을 태우고 재를 치우고 곧 자신도 그렇게 될 때까지의 유예 상태이며 그의 삶 전체는 이제 그 작은 토막들 사이에만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자신도 모르게 감지하는 것은 어떤 '이후'이다. 


종교는 현재의 삶 이후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종교만의 특성을 갖게 되고 동시에 비 종교적인 모든 것들과 차이를 갖는다. 서로 다른 종교는 다른 방식으로 서로 다른 신을 믿고 다른 교리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공통적으로 “삶-이후”에 대한 개념과 설명을 갖고 있다. 종교적이라는 말은 아주 다양한 의미를 가지지만 적어도 '죽으면 모든 게 끝이다.'라는 무력한 지점에서 멈추기 싫다는 태도와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장작에 불과한 한 아들을 품고 랍비를 찾아서 '부족하지 않게' 장례를 치르고 애도하려는 사울의 시간은 종교적이다. 


나치는 사람을 두고 장작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사람을 장작처럼 태우게 함으로써 그렇게 만들 수 있다. 사울은 죽은 아이를 두고 아들이라고 부른다. 아이는 아마 아들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사울은 죽은 아이를 아들로 대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사람은 절대 장작이 아니라는 것과 사울이 모르는 아이를 아들이라고 되뇌이는 것은 각각 이제는 말할 수 있는 진실의 선언(큰소리)과 과거에 강요된 거짓의 기도(속삭임)라는 점에서 정반대에 위치한 표현이지만 그 문장이 도착하는 곳은 같다. 그리고 이와 같은 대칭적인 배치는 이미 죽은 유대인 아이와 숲으로 달려가는 독일인 아이의 배치와 유사하다. 사울이 웃음 지으며 보았던 것은 '이후'가 아니었을까? 지금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고 자신은 여기에서 멈춰야 하겠지만 이 모든 일들이 지나간 '이후'를 그려 본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죽은 유대인의 아들과 어딘가 존재할 독일인의 아들은 모두 사울의 아들이다. 사울이 '이전'의 사람들을 대표한다면 '아들'은 '이후'를 넘어온 우리를 말한다. 우리는 사울이 치른 것들의 보상을 대신 받고 있다. 이후의 사람들은 그들이 겪으면서 지나와야 했던 일들을 빚진 채로 초월하여 있다. 고난과 역경을 대신 받은 사람, 그의 아들. 사람의 아들. 랍비가 신과 유대인 사이를 이어주듯이 영화는 이전과 이후를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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