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률 시인의 '어떤 아름다움을 건너는 방법'에 대한 단상
어떤 아름다움을 건너는 방법
이병률
잠을 자고 있는데 철썩 뺨을 올려붙이는 무언가
마지막 기적의 량처럼
차가운 폭포를 등줄기에 쏟아붓는 무언가
눈이 내릴 것 같다
그 무언가 힘으로도 미치지 못하면서
나를 이토록 춤추게 하는 무언가
내 몸 위에는 한 번도 꽃잎처럼 쌓이지 않는 눈,
바다에도 비벼지지 않는 청어 떼 같은 눈,
태생이 함부로 여서 눈은 생각이 많다
그 무언가 때문은 아닐 텐데 무언가에 의해
그 아무나 때문도 아닐 텐데 아무개에 의해
그러니까 세상 모든 그날들을 닮으면서 내리는 눈.
오늘 내린 눈을 두 눈으로 받아 녹이고서야
울먹울먹 피가 돌았다
단 한 번도 순결한 적 없이 마취된 척
한 세계를 가득 채운 냄새나 좇으며
허술한 사랑을 하려는 나요
눈이 저 형국으로 닥쳐오는 것은 내 마음이 아니란다
이 마을에서 조난을 당해서라도
서로에게 붙들려야 한다면
그 밤 모두 우리는 눈이 멀어야 한단다
* 출처 : 이병률 시인 <눈사람 여관> 중
눈 내리는 풍경을 창 틀을 프레임으로 한 회화 작품으로서 감정한다면 가장 격정적인 것은 눈보라 치는 산맥에서 나올 것이고 가장 쓸쓸한 것은 집에 걸어두려고 화폭에 싸서 가져와보니 녹아버린 진눈깨비일 것이다. 눈이 내리는 사이에 창에 걸렸던 수많은 작품들은 다음날 눈이 그치고 해가 나면 모두 사라져 있다. 그래서 내게서 사라진 것들이 그리워져서 눈이 바닥으로 쏟아지고 있는 광경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눈은 한껏 팔랑거리며 느긋하게 떨어지는데 떨어지는 것 외에 다른 의지는 없어 보인다. 그저 바람이 하늘에 다르게 층을 내놓은 길에 휩쓸려 자신이 어디로 추락하고 있는지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이 무신경해 보인다. 눈은 내려오는 동안 별다른 사건을 포착하지도 않고 그러므로 아무것에도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는 듯하다. 눈은 단지 이 세상이 마음먹은 힘의 방향이 위에서 아래로 끌어당기는 방향으로 있기 때문에 그대로 내려올 뿐인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그것들은 뾰족한 방법이 없어 떨어지는 것이지만 이상하게도 그 풍경은 과하게 비장하지도 오로지 절망적이지도 않아서 내가 떠나온 것들과 닮은 것처럼 느껴졌다.
밤새 무신경하게 내린 눈이 잠든 사이 작품도 되지 못한 채로 창틀 아래 굳이 쌓이고 있다면 도대체 어쩌자는 것일까. 눈이 어떤 높이에서 어떤 속도로 어떤 목표의식을 가지고 어떤 영감과 명석함을 갖고 떨어졌든 간에 그것이 낙하하는 동안 녹아 없어져 버릴 텐데. 그리고 끝없이 팽창한다는 우주의 논리와는 정반대로 이 행성의 중심부로 추락했다는 사실만이 정제되어 남을 텐데. 그럼에도 '사라짐'이라는 질량 없는 단어가 쌓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오직 그들의 우연한 조우가 끝없이 반복될 때뿐일 것이다. 하나가 녹기 전에 다른 하나가 붙는 놀라운 일이 눈치 없이 밤을 채울 때에만 켜켜이 새 캔버스가 마련될 것이다. 마치 우리의 매일이 끊어질 듯 연결되듯이.
다음날 창 밖으로 내다본 풍경은 새로운 색깔을 기다리는 백지다. 밤 사이 떨어져 사라진 것들이 우리에게 남긴 하얀 백지를 생각하면 삶의 무력함도 얼마간 갈증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