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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간의대지 Oct 24. 2021

검진 (1)

짧은 이야기

곧 어떤 종류의 선고를 받게 되는 건 나였지만 그보다는 혼자 있을 고양이가 걱정됐다. 고양이가 나를 걱정하지는 않을 테니 차라리 그 편이 나았다. 낮 동안 몇 가지 정밀 검사를 마치고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지금도 고양이는 내 마음이 어떤지는 전혀 모른 채 혼자 생선 인형을 사냥하려고 폴짝거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수그러들었다. 이틀 전 대학병원에 입원해서 원무과와 검사실을 헤매는 동안에는 거대한 미로처럼 느껴졌는데 돌아올 곳으로 정해진 병실은 금세 익숙해졌다. 병원에서 느끼는 익숙함 만큼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감정도 별로 없을 것이다. 6인실 병실은 나를 포함해서 서너 명 정도가 입원 중이었다. 네모난 병실은 한 사람당 4평 정도의 공간을 조금 왼쪽으로 치우친 병실 문의 왼쪽과 오른쪽 벽에 각각 3개씩 파티션이 나뉘어 있다. 출입문 바로 오른편에는 기역자 모양의 접수대가 있고 그 안에 간호사들이 약을 담고, 주사를 챙기고 무언가 두들긴다. 11시 이후에는 간호사 두 명이 당직을 서는데 대체로 핸드폰으로 영화 같은 것을 보거나, 컴퓨터로 문서를 정리하는 것 같았다. 천장에 달린 커튼은 장난감 기차처럼 여러 칸의 구슬에 메달 린 파란 커튼 천이 매달려 있었다.  병실에서 시계는 별로 의미가 없다. 그것보다는 커튼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더 많은 알람을 준다. 커튼 플라스틱 구슬 같은 것들이 철로 만든 틀을 쓸고 가는 소리가 다른 검사나 링거액을 바꿀 시간임을 알렸다. 이제 고작 입원한 지 삼일째 되는 밤이었지만 대체로 일과는 대체로 비슷했다. 병을 치료하는 목적이 아니라 정밀 검사를 하기 위해 입원한 나로서는 병실은 일종의 대기실처럼 느껴졌다. 아직 뭔가 확실해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부모님이나 친구에게 이야기를 하기에는 조금 이른 감이 있었기 때문에 이걸 가지고 여기저기 얘기하기에도 애매했다. 확실히 기다리게 하는 건 환자를 더 불안하게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다. 차라리 검사를 받고 있는 동안이 편했다. 문에서 가장 가까운 왼쪽 구석 자리에 있는 있는 내 침대에서 대각선 반대편에 있는 할아버지는 한 번의 주기가 아주 길게 코를 곤다. 한 바퀴가 지나가는 동안에 이미 링거액이 열 방울도 넘게 몸으로 넘어온다. 낮 동안에 그는 휴대폰이 확성기라도 되는 듯이 뭔가를 잔뜩 말했다. 간호사가 약을 주거나 다른 검사를 하기 위해서 커튼을 젖히고 들어가면 금세 전화를 끊고 간호사에게 몸 상태를 상세히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꼭 전화통화를 해야만 하는 일이 있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오늘 점심시간에 밥이 너무 적다고 투덜거리면서 내게도 말을 걸었다.


“보소, 아직 한참 젊은 친구가 어째 여까지 왔는가?” 그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아 아니요 저는 아직 검사받는 단계라서요.”


나는 그가 낮에 이미 두 번 쓰러진 상태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그가 나의 상태를 그와 같은 수준까지 상정해버리는 것이 조금 억울했지만 어쨌든 같은 병실에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무례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는 심근경색 증세가 심해서 몇 년 전에도 두 번이나 쓰러진 경험이 있다고 했다. 두 번째 쓰러지고 나서 수술로 심장에 전기식 부착 제세동기를 달았다고 했다. 그가 오른손으로 심장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래도 조심해야 혀.” 그는 오른손의 다섯 손가락을 모두 모아서 아마도 심장이 있을 위치에 대고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나는 심장이랑은 관련도 없는데. 위인데. 그게 낮 동안에 나눈 대화의 전부였다. 


11시에 소등을 해서 잠을 청해봤지만 내일 검사 결과가 나온다고 하니까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시간을 보니 아직 12시도 안되었다. 나는 원래 모로 누워서 자는 습관이 있지만 꼿꼿하게 천장을 볼 수밖에 없는 자세로 누워있다. 오른팔에 링거 바늘이 꽂혀 있었기 때문에 옆으로는 누울 수 없었다. 바늘이 떨어지지 않기 위해 붙어있는 의료용 패치 조각을 끌어당겨보니 살점이 통째로 떨어져 나갈 것처럼 느껴졌다. 반면에 침대는 둥글게 말려서 이미 먼지를 잔뜩 훑어 낸 테이프를 만지는 것처럼 등이 따로 노는 느낌이 들었다. 이대로 여기 아주 오랫동안 있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며칠 만에 이곳에 갇혀 있는 것 같은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는 안될 것이다. 문득 평소에는 잘 다니지도 않는 산책이 하고 싶고 사람이 그리워졌다. 병원에서는 어디를 가든지 발효된 알코올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게 내 몸에 붙기 시작하는 듯했다.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한다.


***


마침내 그가 잠시나마 잠든 사이 이 이야기를 몰래 전할 수 있을 것 같다.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아주 길게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것은 불가피하게도 한 영웅에 대한 혹은 그 한 명의 영웅이 대변한 수많은 가려진 추종자들에 대한 간략한 시놉시스이다. 하고 많은 예술적 방식과 일상의 놀이 매체 중에서 하필 시놉시스라고? 시놉시스는 그 자체로 완성된 형태의 예술 작품을 담을 수 없는 그릇이다.  당연히 시놉시스는 오직 다른 예술 작품을 만들기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서, 대표적으로 영화가 될 텐데, 존재하는 양식이니 말이다. 시놉시스를 토대로 만들어진 어떤 영화를 보지 않고 시놉시스를 보는 것만으로도 영화를 온전히 본 것과 같이 느낄 수 있다면 영화를 만들 이유는 없을 것이다. 보는 사람들은 두 시간이나 들여가며,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는 영상에 시간을 뺏길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물며 재능 있는 감독들은 얼마나 효율적으로 그들의 창의력이 넘쳐흐르는 동안에 현재를 넘어서 미래를 위한 작품들은 잔뜩 만들어 놓을 수 있을까? 그들의 시간 활용도가 높아지면 그들은 인생을 조금 더 파란만장하게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가장 반짝이는 시기에 한 5년 정도만 환상적인 시놉시스를 잔뜩 써내고 짧은 그들의 인생 중 나머지의 시간들은 창작의 고통에서 자유로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할 일을 어느 정도 마친 그들은 영화에서 그려낸 어떤 괴짜보다 더욱 제멋대로 살 수 있을 것이다. 직장인들은 노동의 권태를 자신들만의 특권이라고 생각하지만 밖이 얼마나 넓은지에 대해서 상상하는 사람들이 갇혀 있는 울타리의 범위는 갈 수 없는 곳까지 쳐져 있을지도 모른다. 또 감독들이 멋진 영화를 만든다고 해서 그렇게 멋지게 살고 있지는 않다. 그들도 잘 나오지 않는 창작의 수도꼭지 앞에 서서 경건한 마음으로 대체로 염소 냄새가 나는 물이라도 받아 내기 위해 손가락을 쥐어 짜내야 한다. 인생에서 벌어지는 조 잔 한 일들에 별로 쿨 하지도 않으며 또 갖가지 유혹에도 충분히 약할 텐데, 그런 것에 전부 굴복해 버려도 될 정도의 시간을 확보하게 된다. 어쩌면 사람들은 화전 농민과 같아서 그토록 갈망하던 곳에 도착하면 그곳이 감옥 같아져서 태워 버리고 싶어 안달이 난 게 아닐까? 아니 어쨌거나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어불성설이다. 이유를 댈 필요도 없이 우리가 겪는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알 수 있으니.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의외의 면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그냥 잘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나와 비슷한 면을 발견하는 순간들은 너무나 많다. 그러니까 나는 무언가 전달하려면, 특히나 이야기의 형태로 전달하고자 한다면 오히려 잔뜩 길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저기 사람이 걸어간다. 도대체 이 문장이 다른 더 기다란 문장들의 도움 없이 어떻게 은유 세계의 지지를 받아낼 수 있을 것인가 말이다. 별로 관심도 없었던 사람의 전기문을 쓰려고 하는 작가는 여러 가지 자료를 있는 대로 모아야 할 것이다. 생전에 그가 남긴 사진, 일기, 업적, 기록을 그야말로 손톱에 피가 날 때까지 긁어모아야 할 것이다. 바랜 앨범들 속에 있는 그의 사진 속의 표정을 살펴야 할 것이다. 타임머신을 탈 기회가 있다면 시간이 허락하는 한 영상을 찍어 두고 싶을 것이다. 주변 사람부터 주변 사람의 말에 대한 신빙성을 가늠할 수 있는 지인에 대한 인터뷰를 해야 할 것이다. 사후에 그런 자료를 구하는 것이 어렵다면 결국 방법은 한 가지이다. 한 사람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영상을 찍고 조명하는 것이다. 그가 듣고 말하고 선택하고 그 선택을 받아들이는 순간뿐만 아니라 잠든 순간에 꾸는 꿈에서 상영되는 이미지까지 모두 찍어야 할 것이다. 물론 오디오 녹음도 필요하다. 그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거나, 마음에 있는 말을 꺼내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스캔할 수 있는 카메라도 필요하다. 물론 이런 것들은 철저히 비밀리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인권 침해 가능성에 관한 충분한 고려가 선행된 채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에 연구되고 주제; 인물에 대한 보안성을 해로 갖는 선택 확률 함수로 표현 가능한 윤리적 무고 상수에의 수렴 정리를 살펴보면 이에 관해 고려할 만한 충분히 흥미로운 해석이 있다.) 그리고 이미 수세기 전에 미시 세계에 대한 다소 거칠지만 유의미한 발견이 이루어져 있는 연구결과를 다시 상기할 필요도 있다. 결정론적 거시 세계관과 물리학적 수식으로는 확률 함수로서만 가능한 미시세계의 불일치성이 아직 회복되지 못한 시기에도 이에 관한 통찰이 가능했다는 점은 신기하다. 그러니까 당시의 표현을 빌자면, 어디까지나 확률 함수로서 존재하는 대상의 상태가 관측하는 순간, 그전까지 미 확정이었던 대상의 상태가 확정된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한 물리학자들 간의 논쟁 과정에서 수세기 전에 슈뢰딩거가 자신의 이름을 딴 고양이의 운명을 건 사고 실험을 한 것이 단적인 예시가 될 것이다. 1935년 슈뢰딩거는 고양이를 상자 안에 가두었다. 고양이는 무쇠로 만든 상자 안에 갇혀 있다. 상자 안에는 깨지기 쉬운 용기 안에 담긴 치명적인 독가스가 있다. 이 독가스는 원자의 방사능이 한 시간 안에 붕괴되어 용기를 깨뜨리게 될 확률이 50퍼센트라고 가정한다. 이 고양이의 생사는 50%의 생존과 50%의 죽음의 확률 함수로 나타난다. 관찰자가 상자를 여는 순간 원자의 상태가 확정되고 고양이의 죽음이 혹은 삶이 확정된다. 물리학적 논의와 무관하게 이야기에 관한 교훈은 명백하다. 그러니까 인물의 운명에 불필요한 폭력을 가하지 않기 위해서는 고양이가 우리의 관측을 알지 못하게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무적으로는 가장 많은 것을 담아내려 할수록 관측시간이 길어질수록 관측이 상태 왜곡을 유발할 만큼 시선에 노출되는 강도가 강해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백하자면 시놉시스는 오로지 이 관측자에 의한 왜곡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임을 밝혀 둔다. 그의 수면시간이 이토록 들쭉날쭉하지만 않았더라면 나는 분명히 전혀 반대편에 있는 방식을 차용했을 것이다…. 아까 예를 들었듯이 처음부터 … 잠깐 그가 다시 깨어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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