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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별 Oct 22. 2022

종이 한 장의 기억

오랜만에 낡은 책장을 정리하다 2019년 소년 보호사건의 국선보조인으로 활동하던 당시 작성했던 의견진술서를 보았다.

3년 전의 일이지만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처음 사건을 접한 건 가정법원에서 사건이 의뢰되었으니 방문해서 사건기록물을 열람하라는 연락이었다.

당시에는 집에서 가정법원까지의 거리가 편도로만 3시간 남짓 소요되었기에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그렇게 연락이 온 다음 날 오전에 받아 든 사건기록물은 그 존재만으로 상당했다.

족히 500장 가량 되보이는 사건 기록물은 매일 같이 사건 기록물을 접하는 법원 관계자로서 코웃음 칠 일이겠지만 처음 사건을 담당하게 된 나에게는 이미 기록물의 두께만으로 충분히 큰 위압감으로 다가왔다.

복사한 그 기록물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가슴 팍에 꼭 끌어안고 돌아오며 '대체 그동안 이 아이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 아이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할까?' 등등 수많은 생각과 걱정들이 머릿 속에 가득했다.

오죽했으면 고민만 하다가 종점에 다다라서야 집을 지나쳤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에 보태어 처음 재판이 열리는 심리기일까지 이 아이를 면담해야하는데 또 이 아이의 거주지가 우리집에서만 편도로만 4시간이 소요되는 곳이었다.

지금이야 대중교통 노선이 다양해졌지만 당시에는 그 아이가 있는 동네 근처까지만 가는데에도 갈 수 있는 노선이 상당히 제한되어 있었다.

결국 대중교통을 몇 번이나 갈아타고 가서 만난 아이의 모습은 500장을 넘나드는 사건의 주인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평범한 아이였다.

굳이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밖에만 나서면 볼 수 있는 그런 아이.

얼마나 믿기가 어려웠으면 본인이 맞는 지 물어보고, 신분증으로 본인 확인까지 했을 정도로 의구심이 들었다.

처음 아이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는 '잘못했다'라는 말이었다.

꽤 담담한 어조로 말하는 모습에 '과연 이 아이가 자신의 잘못을 알기는 하는 걸까'라고 생각하던 중 그동안에 있었던 이야기를 이어나가다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막상 아이의 울음을 보니 나조차도 마음이 울컥하기도 하였다.

의뢰인을 변호하는 입장에서는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아이의 선도 가능성, 재비행여부, 피해사실의 인지 여부, 피해회복 가능성 등을 고려해야한다.

그러나 요즘 툭하면 촉법, 촉법하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는 아이들을 볼 때면 인정 사정없이 어른들과 똑같은 처벌 받는 것을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생각해봐야하는 이유는 "촉법"이라는 것의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사람들은 소년법이 약하니 소년법을 폐지하고, 성인들과 같은 처벌을 받게 하거나 소년법을 개정하여 보호처분 그 자체의 수준이나 적용 연령의 하향을 바라고 있다.

하지만 소년법이 정말 오늘날 촉법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면 애초에 소년법을 제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제정 전이나 제정 후나 촉법소년은 똑같이 존재하는데 굳이 여러 사회적 비용을 들여가며 소년법을 제정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촉법을 비롯하여 소년 사건이 발생하는 가장 큰 문제는 '보호의 취약성'이다.

각자 집 한 번쯤 나가 본 적은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보호자가 있었을 것이고, 어떤 이는 보호자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집을 나간 이유는 보호자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나는 힘들어 죽겠는데 집에는 이야기를 하거나 들어 줄 사람이 없고, 나가면 친구들이나 선배들이 있는데 한번 쯤은 학교나 주변에서 이름 좀 들어봤음직한 사람들이 명품 옷 쫙 빼입고, 오토바이나 차를 몰고, 담배도 피는 등등 나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들은 그들은 하고 있었다.

그때는 그게 참 멋있어 보였다.

그래서 처음에 그들과 그냥 옆에 한 번 있었을 뿐인데 언제부터였는지 그렇게 친해져버렸다.

그들과 친해져서 했던 일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혼자서는 수습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기 시작하고, 보호자에게 말하자니 혼날까봐 두렵거나 혹은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아 이야기를 못하겠다.

그래서 주변 친구들이나 선배들에게 고민을 이야기하였고, 그 문제를 해결해주는 어른들을 연결해주었다.

그 어른들은 내 성을 상품화해서 팔아넘기기도 하였고, 아직 주민등록증이 나오기 전이니 지문등록도 하지 않았겠다 내륙으로 마약을 운반하는 운반책으로 나를 이용했고, 어떤 때는 촉법이니 미성년자니 처벌 받지 않으니 누구 하나 찌르고 도망가거나 누굴 속여서 돈 받고 날라버려 수배 나와도 처벌 못한다고 하며 이용했다.

이외에도 그들은 나를 철저히 이용했다.

나는 무엇을 잘못했을까?

나쁜 친구들, 나쁜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며 나쁜 짓을 한 건 정말 잘못된 일이다.

그리고 내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는 반성한다.

그렇지만 아직도 나는 내가 어디서부터 뭐가 어떻게 잘못했는지 잘 모르겠다.

어른들은 이렇게 말하면 아직도 정신 못 차렸다며 혼내기만 한다.

나는 정말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한 것일까?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10여년 조금 넘게 아이들을 만나며 접한 사례다.

아직도 나는 이 아이들이 묻는 질문에 답변하기가 많이 어렵다.

동시에 단지 보호력이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일이 이렇게 커진다는 사실도 놀라울 뿐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있는 것이 없는 것만 못하다'라는 말이 있다.

가족이 있어도 그 가족이 매일 같이 욕하거나 때리고, 어떤 때는 성관계를 하기도, 어떤 때는 아예 관심조차 주지 않기도 하는 등등의 행위를 할 때 나는 어떻게 해야하나.

법을 제정하고, 강화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또한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법에 앞서 필요한 건 사람이고, 그 사람의 상황이다.

그 사람을 둘러싼 근본적인 상황이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법과 솔로몬을 앉혀놓아도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다.

어떤 법이든 마찬가지로 어렵지만 나는 소년법이 정말 어렵다고 생각한다.

실제 심리에서는 보호처분 내려지고 끝나는 것이지만 보호처분이 부과되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까지 생각해봐야하고, 대부분의 법률들이 성인 중심의 관점이라면 소년법은 말 그대로 소년의 관점에서 최대한 풀어내야하기에 많은 고민과 생각을 가지게 한다.

마지막으로 간곡하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아이들을 손가락질하기 전에 그 아이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 시작되었는 지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

변화의 첫 시작은 관심이다.

관심이 없으면 변화도 없다.

나머지 하나는 국가기관과 법조인이 아닌 소년법과 가장 밀접하게 닿아있는 순수 청소년지도사로서 소년법을 본다면 현재 소년법과 관련된 활동을 하면 투자하는 시간 대비 모든 비용이 최저임금보다도 낮다.

내가 바라는 것은 고임금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소년법과 맞닿아 있는 사람으로서 소년법을 연구하고, 소년의 재비행 예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역량을 강화하고, 소년과 만나면서 근본적인 문제들을 풀어나가는데 필요한 활동비의 확대와 인력 양성이다.

소년은 우리의 미래라고 하지만 정말 미래를 생각한다면 현재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어제는 어쩌다보니 흘러갔지만 오늘은 억울한 아이들이 없길 바라고, 그들의 입장에서 함께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존중받는 그런 날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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