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년 후 다시 머금어보는 말
나는 "마음의 병은 오고 가고, 또 오고 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마음의 병'은 그렇게 나를 자주 찾아왔다.
고교시절은 우울의 절정이었다. 대학시절은 평범했다. 평범한 정도의 스트레스를 가진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차차 공부에도 흥미를 붙였고, 더 잘해보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졸업 후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공채로 취직했다.
그 후 크게 힘들었던 때는 첫 아이를 낳고 복직을 한 후 직장맘으로 살던 때였다.
우리 부부는 가족들로부터 육아를 도움받을 수 없었다. 우리는 경기도에 살았고, 시부모님은 캐나다에 계셨고, 엄마는 대구에 살며 일을 하셨다. 처음부터 기대를 한 적도 없었다. 우리 아이는 우리가 알아서 키우겠다는 생각이었다. 출산 후 조리원 2주, 나의 육아휴직, 그리고 복직 후 어린이집의 순서였다. 당연히 힘들었다.
문제는 그 와중에 내가 미래를 위해 뭔가를 더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자격증 공부를 했다. 남편은 내가 하려는 걸 항상 지지했다. 그로 인해 남편이 육아와 집안일에 시간과 힘을 더 쏟아야 했는데도.
나는 저녁과 주말에 시간을 쪼개 공부를 했다. 직장일, 집안일, 육아도 물론 하면서. 무척 힘들었다.
처음으로 정신과 병원을 찾아가 봤다. 그냥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마디를 떼면서부터 나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 의사 선생님은 나의 이야기를 한 시간 정도 들으셨다. 일, 육아, 공부, 어린 시절 등을 이야기했던 것 같다.
나에게 우울, 불안, 강박, 스트레스가 있다고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찾아갔던 것이었다.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그건 허영이에요."
'이게 무슨 말이지?' 나는 귀를 의심했다.
나의 노력을 그 사람이 진단하는 것이 싫었다. 본인은 노력해서 의사가 되어놓고, 다른 사람이 더 인정받고자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는 것을 '허영'이라고 결론짓는 것이 무례하고 거만하게 보였다. 한 시간 정도 내 얘기를 듣고 내 인생을 판단하는 것 자체가 불편했다.
약을 처방받았다. 몇 번 복용했다. 약간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계속 병원을 다닐 시간도, 계속 약을 복용할 자신도 없었다.
나는 준비하던 자격증 시험에 합격했다. 쉬운 시험이 아니었던 터라 사람들은 대단하다며 축하해 줬다.
다음 진료 때 의사 선생님에게 말했다. "저번에 얘기했던 자격증 시험은 합격했어요." 선생님은 별다른 말은 하지 않으셨다. 그날은 세 번째 방문이자 마지막 방문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허영은 헛될 때나 하는 말이고. 나는 해냈다고. 이건 허영이 아니라 현실이지. 허황된 꿈이 아니라고.'
그런데 '허영'이라는 단어가 내 머릿속을 가끔 맴돈다. 이십 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허영'인가 싶은 거다. 멈추지 못하는 내가 '허영'속에 살고 있는 건가 싶은 거다.
둘째를 낳고 우리 가족은 캐나다로 갔다. 한국 자격증을 캐나다 자격증으로 변환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건데 별 쓸모가 없었다. 어쩌면 나는 좀 좋아 보이는 종잇장 하나를 가지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캐나다에 도착한 지 몇 달 후 대학원에 지원했고 합격했다. 입학을 했을 때 아이는 5살과 2살. 남편은 여전히 나를 지지했다. 육아를 도움 받을 곳은 여전히 없었다. 아이들은 유치원과 보육시설에 다녔다.
또다시 심한 불안과 스트레스가 찾아왔다. 나는 그만두는 걸 잘하지 못한다. 포기했을 때 내가 느낄 한심함이 두려웠다. 먼 훗날 후회할까도 두려웠다. 몸이 건강이상 신호를 보내기도 했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석사학위를 따고 직장생활을 했다. 사람들은 캐나다를 천국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사회시스템이 그렇게 좋진 않다. 그리고 직장맘은 어디서나 힘들다.
여러 가지 병이 찾아왔다. 면역력 장애와 관련 있는 병들이었다. 일단 죽을병들은 아니었지만 딱히 정상적인 상태도 아니었다.
파트타임으로 업무를 조정했다. 일을 줄이자 서서히 몸도 마음도 좋아졌다. 그리고 또 풀타임으로 바꾸었다. 직장도 한번 옮겼다.
캐나다 자격증을 따야겠다 싶었다. 오래 걸리는 자격증이었다. 아이 둘 키우며 하기에는 더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그리고 결국 자격증을 취득했다. 힘들었지만 결실을 맺은 기분이었다.
직장일은 언제나처럼 녹록지 않았다. 업무량도 산더미였고, 정치적인 이유로 이리저리 치이고 바뀌는 것도 힘들었다. 그리고 이제 엄마가 병에 걸렸다.
직장을 그만두었다. 5년 동안 못 갔던 한국에도 다녀왔다. 엄마도 더 자주 더 오래 캐나다에서 지내셨다.
그런데 불안했다.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는다는 불안함. 그래서 또 여기저기 이것저것 기웃거리곤 한다.
'이런 게 허영인가? 혹시 커리어우먼이라는 껍데기가 좋은 건가? 그러면 그게 허영인 것 아닌가?'
미래를 위해 자꾸 대비책을 마련하는 것은 아빠가 돌아가신 것처럼 혹시나 무슨 일이 생겨도 살아남기 위한 무의식에서 시작된 것 같다. '아빠 없는 별 볼 일 없는 불쌍한 아이'로 더 이상 보이지 않겠다는 무의식에서도 시작된 것 같다. 이민자로서도 쉽게 차별이나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이들에게도 포기하지 않고 꿈을 이룬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이것이 어린 시절의 '결핍'에서 비롯된 '인정 욕구'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더라도 내가 사는 모습은 결국 비슷비슷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했다면 내가 뭘 하든 나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만족스럽지 않았을까?
'결핍'은 그렇게 나를 끊임없이 따라다녔다. 나를 성장시키는 긍정적인 자극이기도, 나를 무너뜨리는 과도한 괴롭힘이기도 했다.
의사 선생님의 '허영'이라는 말, 그 말이 맞다고 까지는 생각하지 않지만, 틀리진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