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운 친정 오빠 이야기
업보(業報), 카르마(Karma).
참 고마운 친정 오빠 이야기를 꺼내볼까 한다.
어릴 때야 오빠와 싸우기도 하고, 맞기도 하고 그랬다. 어느 날, 나는 자려고 누웠다가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 아빠는 놀라서 왜 그러냐고 물으셨다. "오빠가 지옥 갈까 봐 무서워." 뭘 그렇게 못되게 굴었는지 생각도 안 난다. 그런데도 오빠가 지옥에는 안 가길 바랐던 착한 내가 우습다.
90년대 초쯤, 레슬링이 한참 인기였다. 오빠는 매일 나에게 레슬링을 하자고 했다. 물론 나는 맞는 역할이었다. 훗날 생각했다. '혹시 패고 싶어서 그랬던 건 아니겠지?'
그렇지만 남들에 비해 딱히 심한 일들은 없었다. 그만하면 우리는 평범한 남매였다.
아빠가 돌아가셔서인지, 나이가 들어서인지 오빠는 나를 잘 챙겨주기 시작했다. 오빠는 수재였다. 과외 한번 받은 적 없이도 온갖 수학, 과학 경시대회를 휩쓸었다. 학교성적도 최상위였다. 오빠는 서울의 좋은 대학교에 갔다. 의대에 합격했지만 다른 전공을 선택해서 엄마는 이십 년 가까이 화병에 시달리셨다. 지금은 괜찮다. 모두 나름대로 잘 산다.
대학생이던 오빠는 과외를 많이 했고, 나에게 용돈도 많이 줬다. 매우 이상적인 구조였다. 우리는 연년생이었고, 오빠는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대구로 내려와 고3인 나에게 공부를 가르쳐줬다. 비록 나는 꿈도 희망도 없이 우울 그 자체였던 터라 별로 집중하지 않았다. 돌아보면 대학교 1학년 생이면 방학 때 그저 놀고 싶었을 텐데 스스로 그렇게 해줬다는 게 고맙다. 비록 '소 귀에 경 읽기'였지만.
어느 날 엄마가 나에게 폭발하셨다. 참다 참다 터졌던 건지도 모른다. 우울하고 말도 없고 사람 구실 못할 것 같은 내 모습에 화가 나셨다. 같이 있던 오빠가 우리를 말렸다. 엄마는 '도대체 왜 이러냐'며 나를 다그치셨다.
나는 결국 울분을 토했다. "엄마는 아빠 없어본 적 없잖아." 엄마는 말을 잃었다. 엄마는 상처를 받으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편 잃은 엄마도 힘들지만, 아빠 잃은 나도 힘들다는 사실을 그날만큼은 입 밖으로 뱉어내고 싶었다.
다음날 오빠는 나를 위로하려고 커다란 곰인형을 사서 집에 왔다. 엄마는 '쟤가 뭘 잘했다고 그런 걸 사 주느냐'며 되레 오빠에게 한마디 하셨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곰인형이 가끔 생각난다.
내가 대학교에 입학한 직후, 오빠는 갑자기 전자키보드를 사서 나에게 주었다. 나에게 "가수가 되어라"라고 말했다. 그러려면 내가 피아노를 쳐야 한단다. 우리가 작사, 작곡, 노래까지 같이 하는 뭐 그런 계획이었다. 오빠는 기타 동아리에 가입해 있었다.
그런데 나는 피아노를 못 쳤다. 바이엘 하권 정도 더듬더듬 칠 수 있었다. 피아노학원을 가본 적도 없었다. 어릴 때 엄마가 나를 조금 가르쳐주셨고 (엄마도 초보), 나 혼자서 가요 악보를 사서 혼자 뚱땅거린 게 다였다.
노래를 잘한다는 소리까지는 들어봤으나, '우리가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 생각했다. 오빠말을 들었더라면, 우리는 원조 '악동뮤지션'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물론 아님) 그 근거 없는 자신감이 지금 생각해 봐도 우습다.
나는 대학교 4학년 때 어학연수를 가고 싶어 했다. 엄마는 반대했지만 오빠는 나를 지원했고, 엄마를 설득했다. 엄마와 오빠가 같이 돈을 마련해서 나를 캐나다로 보내줬다. 엄마도 노력했겠지만, 보통의 오빠는 본인이 모은 돈을 동생 어학연수에 보태지 않는다는 걸 나는 안다. 물론 나는 캐나다인 남자친구(현 남편)를 데리고 와서 집안을 뒤집어 놓았지만.
우리는 경기도에 살았고, 엄마는 대구에 사셨다. 첫째를 낳았을 때 오빠는 온갖 육아용품들을 선물해 줬다. 둘째 아이를 출산할 때는 첫째 아이를 오빠와 새언니에게 맡겨야 했다. 산부인과 가는 길에 오빠에게 전화를 했고, 오빠는 한밤중에 첫째를 데리러 와줬다. 그렇게 남편과 나는 병원에서 둘째 아이를 맞이했다. 오빠는 부모님 역할을 해줬다.
오빠는 매우 웃긴 사람이기도 하다. 대학생 때 친구가 개그맨 오디션 지원서를 갖다 주며 가보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오빠는 가지 않았지만 개그맨을 했어도 잘했을 것 같다. 약간 강호동 님의 느낌이다.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오빠는 알츠하이머 초기인 엄마에게도 더할 나위 없이 열심이다. 본인 일도 하면서 엄마가 하시던 일도 모두 도맡았다. 음식, 약, 영양제 등등 모든 걸 철저히 챙긴다. 엄마가 아직은 거의 자립적으로 생활할 수 있지만, 혼자서 하기 힘든 부분은 항상 만반의 준비를 해둔다.
오빠는 나를 여전히 물심양면으로 챙겨준다. 내가 한국에 들어가면 인천공항에서 대구까지 운전은 물론이고, 시간이 날 때마다 여기저기 데려가주고 뭐라도 하나 더 해주려고 한다. 새언니는 참 좋은 사람인데도, 가끔 괜히 눈치 보일 정도로 오빠는 본가에 참 잘한다. 아니, 사실 처가에도 참 잘한다.
오빠는 정이 많고 믿음직스러운 사람이다.
그래서 '업보'와 '카르마'가 생각나는 이유는 이렇다.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후 엄마는 캐나다에도 더 자주 더 오래 머무신다. 아직은 초기여서 아주 힘들지는 않다. 물론 그렇다고 아주 쉽지도 않다. 내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하지만 나는 엄마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오빠를 위해서 잘 해내보려 다짐한다. 내가 엄마와 지낼 때, 오빠가 숨을 고를 수 있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있길 바라며 나도 힘을 내본다. 오빠는 힘든 내색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도움이 되고 싶다.
엄마와 오빠가 나에게 상처만 준 사람들이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멀리 캐나다에 산다는 핑계를 대며 최대한 이 상황을 피하고 싶지는 않았을까. 그럴 수는 없겠지만, 그런 마음이 들 수는 있지 않을까 가끔 생각한다.
오빠는 나에게 잘해주었고, 나는 그랬던 오빠가 고맙다. 오빠가 쌓아온 덕. 그 은혜를 되갚아주고 싶은 나의 마음.
선업선과(善業善果). 인과응보(因果應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