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고생 많았데이...
엄마는 1950년에 경북에서 태어나셨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해였다. 엄마의 고향은 직접적인 전쟁터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피난민은 전쟁 발발 후 한동안 꾸준히 내려왔기에, 엄마의 가장 어렸던 희미한 기억들 속에도 피난민들에 대한 잔상이 남아있다고 하셨다. 창고든 곳간이든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에는 피난민들이 묵었다고 하셨다.
엄마는 4남 2녀 중 맏딸이셨다. 그 당시 맏딸은 집안일과 동생들 육아를 책임지는 경우가 많았다. 엄마도 예외가 아니었다. 외할아버지는 직장을 다니시면서 외할머니와 일꾼들과 함께 농사도 지으셨다. 어른들은 무척 바쁘셨고, 맏딸이었던 엄마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동생을 등에 업고 온 가족 밥상을 차리셨다.
어느 날 엄마는 '왜 맨날 나만 이렇게 온 식구 밥을 해야 되느냐'는 생각에 화가 나서 밥을 하지 않으셨단다. 그날 저녁, 외할머니는 농사일을 마친 후 돌아오셨고 엄마는 된통 혼나셨다.
오일장이 들어서는 날에는 괜히 외할아버지와 마주치고 싶어 장터를 어슬렁거리셨단다. 외할아버지를 만나면 항상 장터국밥을 사주셨기 때문이었다. 국밥 한 그릇 얻어먹으려 어린아이가 혼자서 아버지를 찾아 기웃기웃거렸던 날들을 추억하곤 하신다.
산에서 땔감을 구하고, 나물을 캐던 이야기도 하신다. 한 번은 산불이 났는데, 불이 그렇게 빠를 줄은 상상도 못 하셨단다. 허겁지겁 내려오는 길에 친구의 머리카락이 타기도 했단다. 불은 그냥 번지는 게 아니라, 여기서 저기로 날아다니는 거라며 여전히 그 생각에 아찔해하신다.
엄마는 공부를 잘했는데도 초등학교 졸업할 땐 '중학교에 가지 마라', 중학교 졸업할 땐 '고등학교에 가지 마라'는 소리를 들으셨단다. 어른들은 엄마가 공부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셨지만, 엄마는 애걸복걸해서 결국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셨다.
졸업 후 엄마는 대구에 있는 은행에 취직하셨고, 엄마의 오빠와 동생들도 대구에서 함께 사셨다. 엄마는 은행 월급을 모두 식구들의 학비와 생활비로 썼고 온갖 집안일을 하며 형제자매들 뒷바라지를 하셨다. 외할아버지는 그 대신 결혼할 때 집 한 채는 사주꾸마 하셨는데, 막상 결혼할 때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서 엄마는 참으로 섭섭하셨단다. 그 당시에는 네 돈 내 돈 할 것 없이 집안의 누구든 돈을 벌면 가족을 위해 공용으로 그 돈을 쓰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저 모두가 생존하기 바빴을 때였다.
엄마는 막내여동생까지 대학교를 갔는데 본인만 대학교를 못 갔다는 것이 한이 되셨다. 엄마에게는 사실 큰언니가 있었는데 큰언니는 아기였을 때 목숨을 잃었고, 그래서 엄마가 맏딸이 된 것이었다. 그래서 '큰언니가 살아있었으면 내 인생은 달라졌을 텐데'라는 말씀도 가끔 하신다.
엄마는 아빠와 결혼을 하고 직장을 그만두셨다. 그리고 오빠와 나를 낳았는데, '세상에 이렇게 쉬운 일이 어디 있냐'는 생각을 하셨단다. 어릴 때부터 대식구 살림을 도맡아 하다가 집에서 달랑 아이 둘만 키우는 게 그렇게 쉬우셨단다.
행복도 잠시, 아빠는 44살에 돌아가셨고, 그때 엄마는 40살, 오빠는 12살, 나는 10살이었다. 엄마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고통을 경험하셨다. 하지만 (엄마 말에 의하면) 엄마를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단다. 어떤 사람들은 혹시나 엄마가 자식들 두고 도망이라도 갈까, 혹시나 엄마가 돈이라도 빌려달라 할까 싶어서 단속을 하셨단다. 엄마는 특히나 자식처럼 키워놓은 형제자매들에게 여전히 섭섭함이 크시다. 엄마는 그렇게 또 한이 맺히셨다.
아빠가 돌아가신 지 얼마 후 외할아버지께서 우리 집을 방문하셨다. 비 오는 캄캄한 밤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어두운 표정으로 조용히 막걸리에 김치를 드시다가 금방 떠나셨다. 엄마가 훗날 말씀하시길, 캄캄한 밤에 오신 이유는 과부가 된 딸이 창피해서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나는 어린 나이였는데도 그 말을 믿기 힘들었다. 사실 그 말이 진짜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어떻게 남편을 잃은 딸이 부끄러울 수 있을까. 엄마가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그렇지만 그때는 남편 없는 것도, 아빠 없는 것도 감추고 싶긴 했다. 항상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 같았다.
내가 캐나다인과 결혼을 하겠다고 했을 때 여러 사람들이 좋지 않게 보았다. 그 당시에 국제결혼을 나쁘게 보는 시선은 사회 전반에 깔려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빠가 없어서 어차피 좋은 집안에는 시집을 못 갈 테니까 본인이 좋다는 사람이랑 그냥 결혼시켜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건 우리를 위해서 한 말이었을까. 결론적으로 결혼을 허락하라는 말이었으니까. 그 말의 의도는 차치하고, 우리는 그렇게 편모가정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을 항상 받았다. 우리의 고향이 특히 보수적이기도 했다. 우리가 결혼을 한 20년 전에는 더욱, 그리고 엄마가 남편을 잃은 35년 전에는 더더욱.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우리는 가난했다. 엄마는 어려운 형편에 사회적 시선까지 감수하며 미망인으로 고군분투하셨다. 가끔씩 말씀하신다. "너희들 어릴 때 돈이 없어서 오뎅 몇 개 넣고 오뎅국만 며칠 동안 끓여준 적도 있었는데..." 나는 돈이 없어서 그런 줄 몰랐다. 그냥 주는 대로 먹었다.
그러고 보면 어릴 때 우리 집 밥상이 좀 단출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자라서인지 사람들이 엄마가 해주는 집밥이 먹고 싶다고 하는 걸 어른이 되어서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TV에서 엄마들이 진수성찬을 차리는 모습은 좀 생소했다. 어쩌면 엄마에게 음식이란 빨리 차려서 식구들 허기를 채워야 하는 수단이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엄마는 혼자 힘으로 그렇게도 가난했던 우리 집안을 일으키셨다. 가끔씩 엄마에게 얘기한다. "우리는 흙수저도 아니고 무(無)수저였던 것 같다. 그냥 수저가 없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 같다."
엄마는 젊은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험난한 역경과 고난을 헤쳐나가셨다. 그 당시 많은 어르신들은 그런 어려움을 감내하셨을 테다. 그렇기에 우리 세대는 좀 더 편안하고 안전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겠지 생각하며 또 한 번 감사함을 느낀다.
"엄마, 고생 많았데이. 이제 꽃길만 걷자."